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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눈보 Mar 13. 2023

'긴긴밤'을 견뎌야 할걸 알면서도

[서평] 긴긴밤 <루리>

살아간다는 건, 긴긴밤을 견뎌내야 하는 것.

각자의 지루하고 지난한 긴긴밤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등을 맞대 체온을 나누고, 어두운 길을 손잡고 함께 걸어갈 누군가가 필요하다.


어린이 소설인 '긴긴밤'은 세상에 하나 남은 흰 바위 코뿔소, 그리고 그와 사랑과 우정을 나누고, 험난한 발걸음에 기꺼이 동참해 주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읽는 내내 또 읽고 나서도 그 여운이 걷히지 않아 한참 동안이나 책을 붙들고 눈물 콧물 쏟아내며 엉엉 울었다. 단순히 동물들의 이야기 보단, 우리네 삶의 궤적을 흰 바위 코뿔소 노든의 이야기로 투영시켜 담백하게 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 그래."


노든은 지혜로운 코끼리들과 함께 코끼리 고아원에서 지내며 울타리 밖의 세상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다 코끼리들의 응원에 용기를 얻어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오게 된다. 노든은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게 되고, 곧이어 아이도 얻게 된다. 야생에서 맞이하는 벅찬 행복. 그러나 인간들의 만행으로 행복은 끝이 나고, 커다랗고 질퍽한 불운은 노든에게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그 불운한 나날들을 살아갈 수 있게 한 건 노든의 옆에서 말 벗이 되어주고, 등을 맞대 체온을 나눠주고, 다시 함께 자신만의 바다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친구들이었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면서도 눈을 뜨면 목표를 향해 걷고, 또 걸어 나가는 건 대자연 앞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섭리였다. 노든의 삶은 노든의 것이기도 하지만 오롯이 자신만의 것도 아니기에, 노든은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거창한 질문과 이유를 대지 않는다. 그저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과 옛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 펼쳐질 희망에 대해 노래할 뿐.


노든이 진정한 노든으로서 살 수 있었던 건, 울타리 밖을 뛰쳐나오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긴긴밤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인생에 있어 진정한 행복과 환희는 겪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함께 보낸, 삶에서 가장 반짝이던 순간들. 아마도 노든은 노든이 겪어야 할 커다란 불운의 예고편을 보았더라도,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만나러 울타리 밖을 뛰쳐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행복과 불행은 한 몸처럼 붙어 시시때때로 표정을 달리하곤 한다. 하지만, 생명의 끈질김은 행복과 불행을 관통한다. 죽어가는 순간까지 검은 점이 박힌 알을 품어 펭귄을 낳은 치쿠의 사랑과 그 어린 펭귄에게 살아남는 법을 혹독하게 가르쳐준 노든의 걱정은 어린 펭귄이 생명을 꺼뜨리지 않을 명백한 이유였다.


마침내 바다를 찾은 어린 펭귄은 자신을 살아있게 한 이들의 마음을 모두 끌어안은 채, 긴긴밤이 기다리는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어린 펭귄 앞에 펼쳐질 긴긴밤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노든, 치쿠, 윔보, 앙가부가 겪었던 풍경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펭귄이 마침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방법은, 큰 두려움을 껴안은 채 바닷속으로 첨벙 뛰어드는 방법밖엔 없지 않을까?


어른들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어린이 소설.

삶이 어려워질 때 순수한 눈으로 인생을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한 편의 이야기.

문득, 내 주변의 치쿠, 윔보, 앙가부들을 쉬이 떠올리고 오랜 시간 잊히지 않게 하는 이야기.


소설을 읽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울었지만,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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