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안녕.
안녕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첫 시작의 안녕. 작별의 안녕. 안부를 묻는 안녕.
슬픔의 시작일까, 이별일까, 존재의 확인일까.
제목부터 생각에 잠기게 하는 마성을 가진 이 소설은 프랑수아즈 사강이 18살의 나이로 쓴 첫 작품이다. 18살의 나이에 이런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굉장히 놀랍다. 찾아보니 데뷔하고 나서 대필 의혹도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인간에 대한 심리묘사와 통찰력, 철학적 사고가 뛰어났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 그리고 "여름이었다."라며 밈처럼 사용되는 이 문장이 이 소설 초입부에 나온다. 그 문장의 출처를 찾은 것 같은 반가움과 함께 진정한 "여름이었다."는 이 이야기 끝에 있어야 완벽한 퍼즐이구나 하는 작은 감탄사가 터졌다. 이야기의 흐름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굽이친다. 와, 이거 직진이네 하는 순간 로터리가 나와 회전하고 급커브 나오겠다 하는 찰나 직진으로 달려간다. 통수 맞는 진행이랄까. 읽다 보면 뒤통수가 얼얼할지도.
모래 폭포가 시간처럼 모습을 감추고 있다고, 그건 한가로운 생각이라고, 한가로운 생각을 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라고 느꼈다. 여름이었다.
1950년대에 발표되어 아직까지 활발히 회자되는 이 소설은 왜 고전은 고전인지 보여주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고전은 얌전하게 교훈을 던져주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처럼 독자들에게 시비를 건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사실 읽은진 꽤 됐는데 세실을 떠나보내기가 힘들었다.
세실은 이제껏 살아온 환경과 삶의 방식을 타의에 의해 변화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아버지의 결혼 상대이자 돌아가신 엄마의 친구인 안이 그녀의 인생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유흥을 즐기며 사는 쾌락주의자인 세실과 그녀의 아버지는 안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안은 그들과는 달리 이지적이고 기품 있고 냉정한 인물이다. 그들에게 누구나 말하는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삶의 기틀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 틀 속으로 들어가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세실. 그녀의 내면에 여러 개의 자아가 생겨나며, 쾌락적인 것에 몰두해 살았던 기존의 삶으로 돌아가고자 비극적인 작전을 짜게 된다.
그렇다, 나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안이 미웠다. 그녀는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행복과 유쾌함, 태평함에 어울리게 태어난 내가 그녀로 인해 비난과 가책의 세계로 들어왔다. 자기 성찰에 너무나도 서툰 나는 그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
청춘의 한가운데 뜨거운 뙤약볕을 온몸으로 받고 서 있는 열일곱 살의 세실. 내면에 덜 피어난 채 납작한 형태로 존재하던 자아는 강렬한 경험으로 폭발하게 된다. 폭발 후 떨어져 나간 잔해는 대부분이 슬픔이었고, 안을 잃고 나서야 새로운 감정인 슬픔과 공존하는 법을 받아들이게 된다. 세실의 감정 소용돌이에 함께 휩쓸려 가다 보면 어느샌가 그녀의 슬픔에 동화되고 만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더니 나직하고 참을성 있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넌 사랑을 너무 단순한 걸로 생각해. 사랑이란 하나하나 동떨어진 감각의 연속이 아니란다···.”
열일곱살 소녀의 예민함, 긴장감, 수동적인 반항, 성적 욕망.. 이런 감정 끈들의 시작과 끝을 프랑수아즈 사강은 예리하고 간결한 문체로 짚어낸다. 사실 이 소설을 번역한 김남주 번역가의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이 예민하고 감정적인 문장들을 우리나라 말로 재 탄생시키기까지의 노고가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완성도 높은 번역은 활자로 존재하는 주인공들을 영혼이 깃든 인물로서 만나는 경험을 주며, 이 소설이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존재한다고 믿게끔 하는 설득력을 가진다.
어렸을 땐 세실처럼 따사로운 햇볕을 누릴 수 있는 날씨가 지속되길 바랐다. 하지만 따사로운 햇볕은 지독한 장마와 태풍 따위를 겪어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내면의 '나'라는 우주는 햇볕만으로는 피어나지 못할 씨앗이다. 때론 나를 잠식시킬 것 같은 태풍을 몰고오는 사람을 정면으로 겪어냈을 때, 내면은 새로운 방향으로 피어나기도 한다. 세실이 안을 겪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