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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눈보 Sep 09. 2022

당신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어요.

[서평] 최은영 저 <밝은 밤>

<밝은 밤>을 읽으며 꽤 많이 흐느꼈고 이따금씩 깊은 한 숨을 후, 후, 쉬며 생각에 잠겼다. 글 밑으로 줄을 긋기 바빴고, 내 엄마와 친구와 있었던 장면들이 불쑥불쑥 떠올라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안위가 나의 행복을 결정짓게 된다. 그래서 인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에서의 삼천이와 새비, 영옥이와 미선이, 희자와 명숙 할머니, 주인공 지연이와 지우가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하고, 안심하고, 미안해하며 마음을 나누는 모습들이 내가 사랑하는 친구를 생각하는 깊이와 맞닿아 있음을 실감했다.


나에게도 새비, 영옥이, 희자, 명숙 할머니처럼 멀리 떨어져 자주 보진 못해도 늘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있다. <밝은 밤>이 친구에 대한 전부의 기억을 소환한 탓으로 이번 소설을 읽은 소회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로 모두 채워버릴까 한다.

 

열일곱 살 때 만난 그 친구는 나보다 나를 더 좋아해 줬다고 느낄 만큼 나를 사랑해줬다. 나의 어떤 부분이 그 친구를 끌었는진 모르겠다. 다만 내가 느끼기에 그 친구는 나의 유달리 큰 눈을 좋아했고, 내가 친구의 고민을 가만히 들어주는 모습을 좋아했다. 조용하고 표현에 소극적이었던 나완 달리, 친구는 늘 당차고 어른스러웠다.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해 굴종하지 않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사려 깊게 나를 이해해주려 노력하는 모습들이 좋았다.


내가 갑자기 시골로 전학을 가는 바람에 친구와 이별했을 때도, 이후 친구가 열아홉에 캐나다로 유학길을 떠나며 이메일조차 끊겨 서로의 안부를 모른 채 몇 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도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여전히 이 친구 한 명뿐이었다. 늘 소식이 궁금했지만, 멀리서도 잘 살고 있을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렇게 스물셋에 다시 연락이 닿아 만나게 된 우리는 그간의 공백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서로를 아끼고 자랑스러워 한채 우정을 이어나갔다.


한 번은 친구가 내 아이의 첫 생일을 같이 축하해 주고 싶다며 서울에서 한 달음에 내려와 1박 2일을 우리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나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잠을 쪼개가며 대화의 갈증을 해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친구와 대화하는 시간은 가면을 쓰지 않은 채 진짜 너와 나인 채로 존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마치 나 자신과 대화하는 것처럼. 그래서 어쩌면 나는 내 친구에 대해 많이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새벽, 친구는 유년시절 받았던 상처와 외로움과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헤맸던 마음들을 나에게 고백했다. 아마 성인이 되어 타인으로서 한 가족을 옆에서 지켜보는 상황이 친구로 하여금 깊이 묻어두었던 마음들을 입 밖으로 꺼내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의 고백으로 나는 몇 겹의 시간을 관통해 상처받은 어린 친구의 얼굴을 보고 왔었다. 그리고 친구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 거란 내 자만의 민낯을 마주했다.


친구가 서울로 돌아간 이후 출근해서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운전을 하고, 아이를 돌보는 나의 일상은 변함이 없었지만 친구가 털어놓은 상처는 내 일상에 큰 진동을 주었다. 약 한 달간 친구의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는 언어를 찾아 헤맸던 것 같다. 마침내 할 말을 정리하고 직접 손편지를 적어 마트에서 산 목베개와 함께 택배를 붙인 후 나는 또 친구를 염려했다. 내가 적어놓은 문장들이 잘 해석되어 친구에게 전달되었을까. 편지가 친구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비슷한 걱정들을 했다가 지우고 또 하길 반복했었다.


몇 주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친구와 긴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까지 걱정할 줄은 몰랐다며 잠긴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왔다. 그리고 괜찮다는 편지를 여러 번 적다가 멈췄다고 했다. 내 걱정에 대한 답변으로 거짓을 적을 순 없었다고, 진짜 괜찮아졌을 때 그 이야기를 편지에 담아 보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들을 옆에서 지켜보고 내 편지를 읽고 그 친구 또한 일상에 큰 진동을 겪은 듯해 보였다. 다행히도 좋은 방향으로. 마음이 많이 편해진 걸 느꼈다는 그 한마디에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나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 그 한 마디가 듣고 싶었구나. 친구의 육성으로 전해 듣는 그 말로써 깨달았다. 그리고 마음에 박혀있던 가시가 빠지듯 내 일상이 진정으로 편안 해졌구나를 느꼈다.


소설에서 삼천이가 새비를 걱정했던 마음들이 결국 본인의 행복을 위하는 마음이었음을 느낀다. '당신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라는 강한 믿음과 굳게 연결된 정서의 끈이 닻줄처럼 서로의 인생을 지탱해 살아갈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


증조할머니에서부터 증손녀까지 내려오는 이야기는 묘한 일치감을 준다. 꼭 평행이론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서로의 아픔을 감싸주고 각자의 입장이 되어 살아보게 한다. 그리고 상처와 치유, 여성인권과 차별, 엄마와 딸의 관계, 우정과 질투에 대한 섬세한 상황 묘사가 과거의 기억을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려온다. 그리고 웅크러진 삼천이의 구겨진 마음을 새비가 따뜻한 온기로 펴주었던 것처럼 개인의 상처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한다.


소설을 읽는 순간은 사랑하는 이의 안부를 묻고 싶어지게 하는 밤이었다. 그러므로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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