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 하면 교수의 노예, 대학교의 좀비 이런 이미지가 만연하다. 대학원, 특히 박사과정 가면 고생하고, 고생하는 건 당연시되는데, 이렇게 고생하는 게 당연한가? 그냥 대학원 간 사람이 바보인가? 이래도 괜찮나?
이렇게 연구자가 되기 위한 첫걸음인 박사과정을 밟는 것부터 길고도 어려운 고난의 과정이고, 어찌어찌 만신창이가 되어서 졸업을 해도 박사 후 과정도 비정규직과 박봉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속에서 허우적대고, 교수가 되어도 처음 몇 년간은 실적을 통해서 증명을 해야만 정년을 보장받을 수 있으니 다들 미친 듯이 워커홀릭이 되고, 근데 그 비정규직 교수 자리도 바늘구멍이고.. 그렇다면 연구와 학문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 그리고 가족의 경제적 지원 또는 지원까지는 아니어도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할 의무가 적은 사람만 남을 수 있는데. 그냥 그 사랑과 열정을 바탕으로 너는 하고 싶은 공부 하니까 참으라는, 열정페이가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기는 하지만 특히나 더 심한 학계의 구조를 정당화할 수 있나?
나는 널리 알려진 한국이나 미국의 박사과정에 비하면 그래도 박사과정생들의 워라밸과 졸업 기한이 좀 더 보장되는 편인 프랑스의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했고, 우리 지도교수도 아쉬운 점들은 있지만 그래도 나의 연구에 큰 관심을 가지고 나의 졸업을 진심으로 기원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괜찮은 지도 교수였는데도 쉽지 않은 점들이 많았다. 근데 세상엔 (랭킹이 아니라 대학원생들의 서포트함에 있어서) 좋은 교수와 좋은 대학도 있지만 그보다는 대학원생의 멘탈을 갉아먹는 지도 교수와 구조적 문제가 진짜 많은 게 전 세계 대학원의 현실. 게다가 요즘 어느 나라든 대학들의 연구 프로젝트는 실상 박사과정생과 박사 후 연구원(포닥 postdoc)의 저렴한 인건비에 기대고 있는 것을..
작년 5월에 ReMO Ambassador Training School이라는 행사에 참여했다. ReMO는 Researcher Mental Health Observatory의 약자로 학계의 구조적 문제와 연구자들, 특히 박사과정과 포닥 등 비정규직 계약직 연구자들의 삶의 질과 정신건강에 대해 조사하고 나누는 연구자 네트워크다. 이 ambassador training school은 3일짜리 워크숍인데 연구자들의 삶의 질과 정신건강이 어떤 상황인지, 이의 향상을 위해 어떤 연구와 활동들이 진행되고 있고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을 해오고 있고 무엇을 하면 좋을지를 나누는 자리였다.
나는 박사과정 하면서 우리 지도 교수나 프랑스 박사과정 제도가 아주 나쁘지는 않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힘들고 답답하고 간혹 화도 나고 그러는데!! 나만 이런가? 싶어서 온라인을 열심히 뒤지다가 이건 구조적 문제가 크다는 걸 알게 되고, 학계의 정신건강과 삶의 질에 대한 다양한 세미나도 듣고 몇몇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연구소에서 박사과정생들을 대상으로 삶의 질 향상에 대한 설문도 만들어서 진행했는데 내 박사과정의 막바지에 한 거라 이후에 졸업을 위한 연구와 글쓰기 마무리가 다급해져서 모임 활동도 설문 결과도 가시적인 액션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게 박사과정생들이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박사과정 생존하기도 바쁜데,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려면 또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드니까. 그냥 그 노력을 졸업에 쏟아붓고 졸업하고 탈출하자 하는 생각이 우선시되는 사람이 많고, 뭔가 해보려던 사람도 이게 쉽지가 않으니.
아무튼 이 워크숍은 디펜스 바로 전 주이긴 했지만 너무너무 가고 싶어서 신청했다. 디펜스 준비는 어차피 그전에 미리 해야 되니까.. 3일 워크숍이었는데 너무 좋았고, 학계의 구조적 문제와, 이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고민하면서, 또 각자의 위치에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일부 성공을 거두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지금까지 조금이나마 참여해 왔지만 어떻게 더 참여하면 좋을지 다양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아직 진척은 못 되고 있다. 여름에는 놀러 다니고 구직활동한다고, 회사 다니고부터는 회사 다닌다고 마음이 바빠서.. 뭔가 하고 싶은데 아쉽네.
나는 이제 학계에 있지 않으니까 내가 있는 조직에서 학계와 연구자들을 위해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여러 사람들이 여러 기관에서 하고 있는 활동들을 인터뷰해서 블로그 형식으로 정리해서 온라인에 한 곳에 모으는 “모범 사례 허브 Best Practice Hub”를 만들고 싶었다. 뭔가 문제가 있는데 이걸 개선한 사례들이 있다면 각자의 자리에서 변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일단 나부터도, 이 워크숍에 가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민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해서 실제 박사과정생들과 연구자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을 보니 엄청난 희망이 생겼다.
마음과 시간이 맞는 사람만 하나만 더 있으면 쿵작을 잘 맞춰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테스트 인터뷰도 하나 했었고, 그 인터뷰 한 분이 참여한 활동이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소식을 오늘 봐서 (박사과정생을 포함한 계약직 연구자들이 육아휴직을 하면 연구 계약 기간도 이에 맞춰서 늘어나는) 다시 연락해 볼까? 싶은데.. 이걸 2월에 할 리스트에 추가해야 하나? 중요하고 흥미롭지만 당장의 나에게 우선순위는 아닐 것 같기도 한데.. 좀 고민이다.
박사과정 2년 차쯤부터, 박사과정을 하면서 박사과정을 해 본 (하고 있거나 끝냈거나 중간에 탈출했거나) 친구들과 지인들을 인터뷰해서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도 정리하고 싶었다. 나도 헤매고 있지만 내 주변에 박사과정을 하거나 한 친구들 중에 아무 문제 없이 무난하고 즐겁게 했다 이런 친구들 하나도 못 만나 봤는데 다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고민하고 있더라는. 어떻게 보면 위에서 얘기한 모범사례들뿐 아니라 박사과정의 생생한 후기들과 문제점들을 다 아우르는 데이터베이스가 생기면 좋을 것 같은데!
물론 박사과정을 하고 있고 끝낸 많은 사람들의 블로그와 유튜브 영상들이 있지만, 자기의 채널을 만들 열정을 가지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은 또 그 나름대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라면 도움이 되었을 것 같은데. 이 고생과 힘듦은 내가 부족하고 나약해서 나만 하는 게 아니고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서 다들 하고 있다는 점을 실제 이야기를 통해서 들으면 위로도 되고, 이를 통해 주변 사람들과 이런 이야기를 더 많이 하면서 동지도 찾을 수 있고, 그러다가 어떤 액션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어떤 액션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부분에 있어서는 모범사례 허브가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물론 액션으로 안 이어지고 위로를 받는 건만으로도 충분하기도 하고.
글을 쓰다 보니까 당장은 아니더라도 올해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하는 의욕이 샘솟는다. 일단 동료 기획자를 하나 더 섭외해야겠다. 사실 이 동료 기획자는 뭘 꼭 안 하고 그냥 내 얘기를 듣고, 원한다면 아이디어를 보태고, 내가 이 일을 하는지 안 하는지 체크만 하는 역할만 해도 되는데.. 2024년에는 특별한 형식을 따지지 않고 자유롭게 인터뷰를 해서 내 블로그에라도 올려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