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연표를 보면 낭만주의에서 인상주의로 발전해나가며 사실주의(Realism) 사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사실주의에 대해서 살펴보던 중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01. 사실(寫實)주의는 사실 사실(事實)주의가 아니다.
사실주의 사조의 대표작품(절망하는 남자, 돌을 깨는 사람들 - 구스타브 쿠르베 / 삼등열차 - 오노레 도미에)
사실주의 미술 작품을 살펴보면 위와 같이 매우 사실적입니다. 영어로도 사실주의는 Realism이라고 씁니다. 그래서 저는 당연히 사실주의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가치를 둔 미술사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사실주의의 사실이 우리가 알던 사실과 다른 한자를 쓴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실(事實/일 사, 열매 실)은 실제로 일는 일 그 자체를 뜻합니다. 하지만 사실주의에 사용되는 사실(寫實/베낄 사, 열매 실)은 실제로 있는 일을 그리는 것을 뜻합니다. 거의 같은 말이긴 하지만 두 단어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주의가 사실(寫實)주의인 이유는 그들이 관심이 있던 것이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보다는 사실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상 속의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과 진짜 있는 인물을 그리는 것은 다르고 사실주의 작가들은 진짜 있는 인물을 그리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02.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천사를 그릴 수 없다. - 구스타브 쿠르베
인상주의보다 먼저 기존의 낭만주의/아카데미 미술에 반기를 들고 역사적 사건이나 성경 속 장면이 아닌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당대의 모습을 그리고자 한 것이 사실주의입니다.
사실주의 사조의 대표적인 화가 구스타브 쿠르베는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천사를 그릴 수 없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사실주의에 대한 철학이 확고했습니다.
이삭줍기 - 밀레 / 돌을 깨는 사람들 - 쿠르베
위의 두 작품을 그린 밀레와 쿠르베 모두 동시대에 활동한 사실주의 화가입니다. 하지만 사실주의에 대한 태도는 둘이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밀레의 대표작 <이삭줍기>와 쿠르베의 <돌을 깨는 사람들> 둘 다 멋지고 낭만적인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당시 서민들이 노동하는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밀레는 이삭을 줍는 농민들의 모습을 "멋지게" 그려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적절한 구도에 적절한 자세의 농민을 배치함을 통해서 현실의 모습을 멋지게 그려내려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쿠르베는 조금 더 거친 느낌이 있지만 그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두 작품 모두 제가 평가할 수 없는 초초초초초대작이지만 사실주의의 철학을 통해 살펴보면 쿠르베의 그림이 조금 더 "사실주의"스럽다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03. 19세기의 "그것이 알고싶다", 사실주의
오르낭의 장례식 - 쿠르베 / 삼등열차 - 오노레 도미에
사실주의 작품을 살펴보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사실주의 작가들은 진짜 자기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그리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것은 "서민의 모습"이었습니다. 쿠르베와 함께 사실주의 사조의 대표적인 작가로 뽑히는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열차를 살펴보면 뒤 쪽의 중절모를 쓴 사람들의 모습과 앞쪽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대비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차에 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 당시의 모습과 함께 작가가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실주의 그림은 필연적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담았고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을 통해 뭔가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독하게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외면하고 있던 어두운 모습을 마주하게하는 것이 사실주의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