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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의취향과 윤글 Apr 05. 2018

[단편] 운이 나쁜 여자, 운이 좋은 남자 1

1.
  회색 수트를 차려입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남자와, 네이비 색의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마주보고 있다. 그녀는 어색한지 앞에 놓인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시다가 내려놓고 손을 꼼지락댄다. 그러다 그가 있는 쪽을 보고 말한다.


"여기 커피 맛있지 않아요? 제가 여기 처음 생겼을 때부터 1년째 단골이거든요. 사장님도 잘 아는데. 여기 친절하고 괜찮죠?"


"그러게요. 맛있네요. 체인점은 아닌 것 같은데, 개인 카페인가 봐요. 분위기가 좋네요."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간신히 이어지는 대화는 둘 사이의 긴장감을 더 높이는 데에 일조하고 있었다.

  몇 마디의 말이 더 오간다. 취미라든가, 좋아하는 영화 취향 따위의 대화였다. 그러다 그가 말한다.


"어, 볼이 발그레해졌어요. 화장 때문인가?"


  그는 끝을 살짝 흐리며 반말을 섞어본다. 그녀의 긴장을 좀 풀어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아, 아아 그런 건 말하지 않으셨음 좋았을 텐데."


"그런가요? 제가 매너가 없었네요. 죄송해요."


"아니 뭐, 그러실 것까지는 없어요. 제가 아까 그쪽 기다리다 더워서 커피를 한 잔 마셨거든요. 카페인이 잘 안 받는 편이라 그래요. 아이고, 여기가 쿵쿵대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한 손은 붉어진 볼에 손을 가져다 대고, 한 손은 주먹으로 명치 조금 위쪽을 툭툭 친다. 그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살짝 웃는다. 그녀가 눈치채지 않도록, 무안해서 다른 변명을 생각해내야 하는 곤란을 다시 겪지 않도록. 그러나 그녀는 꽤 눈치가 빠른 모양이었다.


"아, 제가 아까까지 기침을 하고 있었더니 그런가 봐요."


"어디 아프세요?"


"아뇨, 사레들어서 그래요. 괜찮아요."


  핑계를 다르게 대느라 더 붉어진 얼굴이 꽤나 귀여웠다. 그는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참는 게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는 그녀에게도, 그 자신에게도 진정할 시간을 좀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가 시야 밖으로 사라지자 그녀는 허겁지겁 가방을 뒤적여 파우치를 꺼낸다.




2.
  손거울 속에 보이는 그녀 자신의 얼굴은 홍당무가 따로 없었다.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얼굴을 때리다시피 두드리며 화장을 고친다.


"아, 제발. 제발 가라앉아라, 제바알."


  그녀는 볼을 두드리다 갑자기 맥이 풀리며 두드리던 손을 탁자 위로 툭 떨군다.


"애프터 신청도 없을 텐데 뭐? 저 사람은 내가 마음에 안 들 거야. 내가 더 꾸며 봤자 호박에 줄긋기밖에 더 되겠어?"


  그녀 자신을 깎아내리는 버릇도 최근 들어 심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에게는 연초부터 끊임없이 좋지 않은 일들이 몰려왔다.

  그녀의 어머니께서는 운세나 별점, 사주 등의 비과학적인 얘기들이 종종 들어맞는다며 그녀의 운세를 보고 오시곤 하셨는데, 이번 년도에 액운이 꼈다고 그녀에게 조심하라고 하셨다.

  그녀는 매번 그렇듯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공교롭게도 1월 1일이 되자마자 몸살 때문에 너무 아파서 응급실에 실려 갔다 왔고, 몸이 다 낫자마자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 이후로 불면증 때문에 종종 밤을 샜고, 그 덕에 몸도 마음도 온전치 못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녀는 한 달 만에 벌어진 일들에 진이 다 빠져 자신에게 정말 액운이 낀 모양이라고, 불운이 다 자기에게 온 것 같다고, 그래서 이번 해에는 절대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을 알 리가 없는 그녀의 하나뿐인 절친한 친구가 몰래 소개팅을 잡았고, 그녀는 친구를 곤란하게 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곤란한 게 낫다고 생각하고 나온 게 이 자리였다.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수정 화장을 마무리했다.


"나쁜 이미지로 남는 것보단 낫겠지, 내가 아무리 꾸며도 저 사람한텐 내가 별로일 테니까. 괜찮아, 다시 볼 일은 없을 거야. 이번 해엔 운이 나빠."




3.
"왜요? 우리 다시 보면 안 되나요?"


  어느새 다가와 있는 그의 얼굴엔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어..언제 오셨어요? 세상에, 깜짝 놀랐잖아요!"


  그녀는 당황해서 또 얼굴이 붉어졌고, 수정한 화장이 다시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걸 알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인상을 쓴 그녀의 모습이 꽤 귀엽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방금요. 제가 또 매너 없게 굴었나요? 놀라셨다면 또 죄송해요."


"아, 아뇨. 뭐, 괜찮아요."


  괜찮다고 하면서 얼굴을 부채질하는 그녀의 손이 빨라졌고, 그런 그녀 덕에 그는 자꾸 웃음이 새어나와 헛기침을 거푸 해야 했다.


"커피 다 마셨으면 이제 나갈까요?"


  그녀 역시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없이 옆에 둔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움직임에 그 역시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둘 다 앉아 있었던 탓에 망가진 옷매무새를 잠시 정리했고, 그녀가 먼저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굽이 꽤 높은 신발을 신고 있어서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그녀의 손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다짜고짜 손을 잡으면 삼진아웃에, 매너 꽝으로 영영 찍힐 것 같았다. 그래서 계단 손잡이를 꼭 잡고 천천히 내려가는 그녀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4.
  둘은 1층 카페 출입구에 다다르고, 그녀가 문을 열려는 찰나, 뒤에서 그의 큰 손이 먼저 문을 열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고, 그도 뒤따라 나왔다.


"아 덥네요. 아까 비 오더니 끈적거리고. 덥고 습한 거 너무 싫은데."


  카페 밖에 나오자마자 볼멘소리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불쾌한 습기로 가득한 한여름에도 그를 웃게 만들었다.


"그럼 다시 들어갈까요?"


"방금 나왔는데 어떻게 그래요? 게다가 우리 너무 오래 있었잖아요."


  그는 그녀 입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나온 게 괜히 뿌듯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그녀가 그를 두고 카페 입구를 지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얼른 따라갔다.


"우리라, 좋네요. 우리 이제 어디 갈까요?"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서서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저랑 더 같이 있으려고요?"


"싫으신가요?"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요?"


"아, 어...제가 마음에 드세요?"


  그녀는 아까 전에 핑계를 대며 당황하던 표정을 다시 지어보였다. 그는 자꾸 웃는 자신의 모습이 이상해보일까 봐 억지로 웃음을 참아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단도직입적인 질문이네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면 이럴 이유가..아, 혹시 매너? 이번엔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는 그녀가 아까 혼잣말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정말 별로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는 허리를 조금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쪽이랑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요. 오늘 저 말고 다른 약속 없으시면 저랑 좀 더 같이 있어요."


  그녀의 볼이 붉어졌다. 이걸 또 말해주면 더워서 그렇다고 변명할 걸 생각하니 그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지어진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볼에 손등을 갖다 대고 작게 심호흡 몇 번을 하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앞서 걷기 시작한다. 그는 또 그녀를 서둘러 따라가 옆에 선다.


"아..다른 약속이 없긴 한데, 같이 할 게 생각이 안 나네요."


"그럼, 우리 영화 볼까요?"


  그녀는 잠시 멈추고 그가 있는 쪽으로 돌아봤다. 그는 속으로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그녀의 눈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어..죄송해요. 제가 요즘 상영하는 영화를 다 봤거든요."


"아하하, 그러셨구나. 그럼 다른 데 가면 되죠."


  그의 눈에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이 보였다. 그는 수트 안쪽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아까 카페에서 정하고 나올 걸 그랬어요."


"그러게요.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아까부터 눈을 못 마주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또 먼저 가려는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아 돌려 세웠다.


"일단, 저기로 가요."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은 은행이었다.


"은행에는 왜요?"


"지금 너무 덥잖아요. 저기 가서 잠깐 땀 좀 식혀요. 관공서는 시원하잖아요."


  그녀는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이번 해의 액운이 제발 끝났기를, 자신의 불행을 그에게 떠넘기지 않을 수 있기를 속으로 계속 기도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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