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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의취향과 윤글 Mar 19. 2017

다락, 선풍기, 흑연

선풍기를 다락에 넣었다.


못쓰게 된 선풍기를 다락에 넣으러 왔다. 나는 더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선풍기는 자신을 학대하는 것처럼 날개를 휘청이며 달그닥거렸고, 피복이 벗겨진 코드까지. 잘못하면 나도 다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이 선풍기의 전원을 뽑고 사망선고를 했다.


생각보다 무거운 선풍기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좁은 계단을 올라 다락에 다다랐다. 오래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다락이라 입구에서부터 먼지가 눈처럼 쌓여 있었고, 다락으로 들어가는 문은 선풍기의 날개보다 훨씬 더 낡아 있었지만 문의 구실을 어떻게든 하려는지 꿋꿋히 버티고 있었다. 내가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끼익-하고 칠판 긁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에 소름이 끼쳐 잠시 아득해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아주 오랜 습관처럼 문과 벽 틈을 살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릴 때 자주 들어왔던 것 같다. 저 문과 벽 틈에 숨어 있으면 같이 놀던 언니가 살금살금 다가와 오히려 나를 놀래곤 했었다. 그 언니와는 연락을 이어갈 수 없었다. 아주 먼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다락은 먼지로 뒤덮여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안쪽으로 조심히 걸어가서 작은 창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맞는 볕에 몸을 맡기듯 눈을 감는 추억들이 적지  않았다.


빛이 가장 잘 드는 곳에 이곳에서 가장 어린 선풍기를 놓고, 나도 옆에 못쓰는 선풍기처럼 앉아보았다. 달그닥거리며 제대로 돌지 못하던 날개도 돌아가지 않으니 멀쩡해보였다. 괜히 날개 쪽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만지다가 손에 거멓게 묻어나는 먼지를 보고, "이제 다시는 네 날개를 깨끗히 씻어주지 못할 거야. 이제는 이 다락에서 나가지 못할 텐데, 여기서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너는 점점 더 못쓰게 되겠지." 라고 주절거렸다. 아마 누군가가 이 광경을 봤다면 당최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코웃음을 픽 흘렸을지도 모른다.


선풍기가 있는 기억 몇 가지를 더듬어 다락 바닥에 끼적거렸다. 연필 대신 검지손가락이 흑연처럼 까매졌다.


다락을 나오면서 어릴 때처럼 문과 벽 틈에 서보았다. 추억은 더듬을수록 선명해지는 법이니까.


저 선풍기의 기다란 꼬리가 다시 다락 문턱을 넘을 일은 아마도 없을 테니, 나중에 내가 다시 들어와 바닥 청소를 할 때 즈음엔 선풍기에 기대 앉았던 날이 새 추억이 되어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한강 소설 <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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