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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의취향과 윤글 Jun 17. 2016

습한, 슬픈 날

여름의 초입, 당신을 다시 만나다.



늦은 저녁, 3년째 굳게 닫혀 있던, 사람이 살지 않아 스산한 기운마저 감돌던 집 현관이 한 여자의 손길에 손쉽게 열린다.

여자는 큰 캐리어와 여러 개의 쇼핑백, 그리고 얼굴 가득 짜증을 매달고 현관을 연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레 시선을 한 곳으로 가져간다.


"그대로네."


여자의 시선이 닿은 곳은 바로 싸구려 장식장 위, 액자 속이다. 여자와 남자는 꽃밭을 배경으로 나란히 앉아 있다. 액자를 보는 여자의 얼굴과는 다르게, 사진 속 그들은 여전히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다.


"나쁜 자식."


너무나 당연하게도 욕부터 나오는 얼굴. 그래서 더욱 미워하지도 잊지도 못할, 그런 얼굴.
여자는 한숨을 내쉬고 액자로부터 시선을 거둔다. 그리고 비어 있던 집에다 자신의 기운을 채우기 위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안녕, 당신. 오랜만이야. 집은 잘 지키고 있었어? 여긴 안 덥지? 밖은 진짜 찜통이야. 아까 천둥번개 치고, 비도 오고 그러더라고. 비 그치고 나니 공기가 습기를 머금어서 최악이었어. 나 땀 나는 것 좀 봐. 찝찝해. 얼른 샤워 좀 하고 나올게."


말을 끝내고 간단히 짐을 푼 그녀는 뱀이 허물을 벗듯 옷가지들을 훌렁훌렁 벗어제끼고, 욕실로 가서 차가운 물을 튼다.


쏴아아-. 물줄기 소리가 집 전체에 울리다 이내 멎고, 그 뒤를 이어 여자의 콧노래가 거실로 흘러나온다. 여자의 기분이 나아졌음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찬 물로 사워를 마치고 나온 여자는 그제야 액자 속의 그녀와 조금 닮아 있었다. 기분 좋은 미소를 얼굴에 걸어 둔 모양새였다.


"왜 하필 오늘 날씨가 이런 거야! 당신 때문인가? 정말 열 받은 아스팔트의 기분을 알 것 같았어. 낮에는 온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니까? 죽을 뻔했어, 정말."


여자는 멈칫한다.

죽음에 대해 쉬이 입을 놀리지 말자고 다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그런다며 속으로 자신을 다그치고, 잠깐 지었던 미소를 잃는다. 살면서 한 번도 미소를 지을 일이 없었던 사람처럼. 하지만 무표정한 여자의 눈매는 어쩐지 처져 있다.

여자는 캐리어에서 꺼낸 수건으로 물이 뚝뚝 흐르는 머리칼을 대충 닦는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그나저나 안 됐다, 당신. 이제 샤워하고 바로 나온 내 섹시한 모습도 못 보고 말이야."


여전히 처진 눈을 한 여자는 자신이 한 헛소리가 웃긴지 쿡쿡 소리 죽여 웃는다.

여자는 수건을 뒤집어 쓴 채 집을 둘러본다.


"당신만 없구나, 당신만."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배가 무척 고픈 여자는 냉장고 문을 열어 젖힌다. 그리곤 망연자실한다. 오랫동안 사람 한 명 들이지 않고 비어 있던 집의 냉장고가 멀쩡할 리 없다는 것을 깜박한 것이다.

냉동실은 열기도 전에 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고, 열자마자 썩은 물을 여자에게로 전부 토해냈다. 게다가 냉장실엔 남자가 사 놓았던 레토르트 음식들이 가득이었는데, 그마저도 유통기한이 다 지나 먹지도 못할 것 같았다.


여자가 만들어 넣어둔 음식들은 자신을 잊은 여자에게 잔뜩 성이 나서 제 몸에 곰팡이를 피웠고, 자신들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냐고 캐묻는 것처럼 쿰쿰한 냄새를 온 집 안에 풍겼다.

여자는 누그러졌던 짜증이 다시 치밀었지만 자신의 잘못이니 어쩔 수 없어 그만 허탈해지고 말았다.


"와, 냉장고 꼴이 이게 뭐야? 당신이 봤으면 기절했겠다. 저거 먹으면 죽겠지? 당신 따라서 콱 죽어버릴까?"


또 멈칫.


"아, 장난이야. 죽긴 왜 죽어? 당신 몫까지 살 거야, 악착 같이. 젠장. 장이나 보러 가야겠다."


여자는 힘이 다 빠진 손으로 냉장고 플러그를 꽂고, 전원을 켠다. 그리고 제 말에 제가 당황하는 꼬락서니가 웃긴지 또 작게 웃는다. 이번엔 아주 슬픈 웃음.

여자는 캐리어를 뒤적여 거적때기 같은 옷을 하나 꺼내 대충 어깨에 걸친다. 신발장으로 가서 밑창이 다 뜯긴 낡은 슬리퍼를 꺼내 신는다.


"아, 이거 당신이 신던 거구나."


한숨을 내쉰다.


"당신이 그랬지, 내 쌩얼은 남들 눈에 해롭다고."
여자는 검정색 야구모자를 집어 들고 힘 주어 푹 눌러 쓴다.

여자는 현관을 나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 액자를 다시 바라본다. 자꾸 튀어나오려는 욕을 꾹 참는다.


"당신이 그렇게 가버린 지 3년째 되는 날이야. 오늘 내가 거하게 한 상 차려줄게. 기대하고 있어. 다녀 올게."


여자는 습기가 가득한 미소를 액자 앞에다 던져 놓고, 현관을 나선다. 액자 속 남자의 미소가 습기를 머금고 쪼그라든다.


"아, 역시 오늘은 날씨가 너무 습해."


여자의 퉁명스런 혼잣말과 슬리퍼 끌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뱉어진 말과 발자국이 닿을 자리가 더 이상 없어서, 여자의 귀로 되돌아간다.

여자는 오늘 밤에도 비가 많이 올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걷는다.






윤, 그리고 글.

Instagram.com/amoremio_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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