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자라듯 추억도 자란다.
명절 때 가족이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평소에는 다들 바쁘니까. 명절만이라도 모여서 서로 사는 이야기도 나누고 조언도 하며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어릴 적엔 설날명절은 꼭 한복을 갖춰 입고 큰집으로 가서 세배를 했다. 새해 첫날 아침은 온 가족이 함께 먹어야 했었다. 세배를 하면 할아버지는 큰소리로 웃으시며 새 돈으로 세뱃돈을 주셨다.
우리 가족은 월남해서 내려오신 할아버지 형제분들이 모두 크리스천의 성직자였기 때문에 제사를 드리지는 않았다. 다만 아침식사를 할 때 할머니는 큰소리로 울먹거리시면서 길고 긴 감사기도를 늘 하셨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할머니의 기도가 점점 더 길어지면 우리는 실눈을 뜨고 전이라도 하나씩 입에 몰래 넣으면 키득거리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우리 가족들은 추석이나 설 때는 펜션을 빌려 2박 3일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소주도 한잔 하며 이야기 꽃을 피운다. 조카들까지 포함해서 현재 2, 4, 5, 6학년과 중2까지. 또래의 사촌들은 기질과 성향이 모두 다르지만 큰소리 한번, 우는소리 한번 안 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논다. 신기하게도 젤 큰 중2형님과 초등학생 2학년 막둥이가 젤 잘 맞는다. 3일의 시간이 아쉬워 헤어질 때마다 아쉬워서 눈물바람이다. 그렇게 밤새 놀고도 놀거리가 남아있는 것도 신기하고 체력도 대단한 아이들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린 시절 어느 장소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행복한 추억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나중에 그 추억만으로도 사촌지간의 사이가 지속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삶의 행복한 추억 한 부분은 살아가며 힘든 일들이 있을 때 든든한 힘이 되리라 믿는다.
나 역시도 어릴 적 엄마, 아빠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있다. 초등학생 때는 매년 여름방학 때마다 가평 쪽 계곡을 갔었다. 지금은 아주 많이 변했지만 나 20살 때까지만 해도 그 계곡은 휴대폰도 터지지 않았던 곳이었다. 계곡 앞에 텐트를 치고 일주일이상 머물다 오곤 했는데 한날은 폭우가 갑자기 쏟아져서 텐트 앞까지 물이 찼다. 급류에 휩쓸릴 수도 있어서 동네 이장님이 위험하다고 대피하라고 소리치며 다니셨다. 부랴부랴 비를 맞으면 급하게 정리를 하고, 시내 쪽 숙소를 잡아 나왔다. 온 동네가 깜깜하게 정전이 되어있었다. 핸드폰도 없었던 시절이라 정전이 되면 불을 키웠어야 했다. 생각해 보니 그 시절엔 집안에 초가 꼭 있었다. 아빠는 저녁도 못 먹은 우리에게 빵과 우유라도 먹이려고 작은 슈퍼에 가서 이것저것 사 오셨다. 작은 골방 같은 곳에 네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촛불하나를 의지해서 빵과 우유를 먹었는데 우유맛이 이상했다.
"아빠, 우유가 맛이 이상해"
"시원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으니 그냥 먹자"
비 때문에 아무것도 못 먹었기에 우리는 그 빵과 우유를 더 맛있게 느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우유를 보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우유는 유통기한이 일주일이나 지난 것이었다.
"거봐, 이상하다고 했잖아!!"
"안 보이니까 몰랐지~ 괜찮아~"
아빠는 늘 그렇게 괜찮았다.
"에이~ 괜찮아~ 그러면 어떻고 저러면 좀 어때? 재미있으면 되는 거지"
아빠는 원효대사도 해골 물먹고 살았다면 별 탈 없을 거라고 나를 위로했었지만 나는 배에 이상한 곰팡이라도 생기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했었다. 다행히도 상한 우유를 먹었지만 화장실을 몇 번 들락거릴 거 외에는 큰 탈이 없었다.
다음날 날씨는 쾌청해졌다. 비 온 직후라 미꾸라지 낚시도 할 수 있었고, 물이 불어 급류에 튜브를 타며 신나게 놀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 이야기가 나오면 재미있어서 배꼽을 잡는다.
유통기한이 일주일이 지난 상한 우유를 먹어도 괜찮았던 건 먹어도 되는 우유를 먹었다고 생각했던 거였을까?
촛불하나를 의지하며 오손도손 우리 가족이 재미난 식사를 해서였을까? 난 후자에 한표!
이번 설날에도 작년 추석 때 왔었던 캠핑장을 왔다. 같은 장소이지만 여름과 겨울이 이렇게나 다르다.
작년엔 더워서 물놀이도 실컷 하고 물고기도 엄청 많이 잡았었다.
캠핑사장님 말씀으론 20년 만에 이렇게 눈이 많이 온건 처음이라고 하실 정도로
이번 설에는 눈이 많이 왔다.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신나게 논다.
나는 아쉽게 일을 하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이렇게 힘을 합쳐서 눈사람과 이글루를 만들었다.
아이들은 발가락이 부서질 듯 시려도, 얼굴이 빨갛게 되어도 신이 나서 추운지도 모르고 놀았다.
겨울에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눈이 오지 않으면 않는 대로 우리는 또 이야기할 것이다.
"지난번에 눈이 엄청 와서 우리 이글루 만들었었잖아~ 재미있었는데!!"
"지난번엔 이글루를 만들 정도로 눈이 왔었는데, 요즘은 통 눈이 안 오네~ 정말 재미있었는데!!"
이렇게 눈에 관한 추억이 매번 겨울마다 소환되며 즐거워하겠지~
캠핑의 꽃은 겨울의 불멍이라지만, 나는 내복을 입었는데도 오랜 시간 버티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하고 온 엄마를 위해 삼겹살을 굽고, 군고구마를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신나게 놀았다.
며칠 전 서울에서 공수해 온 내가 7살부터 30년을 넘게 먹어온 낙산냉면과 신당동떡볶이도 함께 먹었다.
나의 어린 시절 추억 가득한 음식을 아이들과 맛있게 먹으며 또 다른 우리들의 추억이 생겼다.
매년 아이들은 커간다. 언제까지 나와 함께 여행을 다녀줄지는 모르겠다. 바쁘다는 핑계로 전국을 누비고 있는 엄마를 기다리다 반짝이는 눈으로 맞이해 주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전생의 나라를 구했나 싶다.
그래서 이렇게 예쁜 아이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부모들은 자식을 보며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족마다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이지만 말이다.
나는 한 해의 시작인 설 명절에는 가족과 함께 우리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하고,
한해의 결실을 맺는 추석에는 우리의 풍요를 나누며 따뜻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리고 아이들의 키가 자라듯, 우리가 함께 하는 명절날에는 추억도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