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 소설 #1 수요일
지난 밤에도 지환은 병원에서 처방 받은 약을 먹고서야 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출근 할 생각만 하면 가슴이 조여오는 듯 했다. 제어하지 못한 상상이 뇌리를 파고든다. 제출한 보고서에 오탈자가 많다거나, 중요한 정보를 빠뜨렸다거나 하는 그런 내용들로 상사에게 혼나는 모습들이 스쳐지나간다. 몸은 침대에 누워 있는데, 사무실 김 부장 앞에 서 있을 때처럼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달리기 하듯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 도무지 잠이 들 수 없는 것이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면, 어김없이 다음 날 몇 차례 실수를 했다. 잠을 잤더라도 실수는 했을테지만. 이런 사람들이 흔해 빠졌다는 듯 정신과 의사는 무덤덤하게 약을 처방해줬다. 의사도 지난 밤 병원에 출근 하기 전 불안했을까. 약을 먹었을까. 지환은 생각하다가 의사도 그러했으리라 생각해버리기로 했다. 무미건조한 의사의 표정을 섭섭하지 않게 생각하려면 그 편이 나았다.
수면 시간은 7시간으로 충분한 것 같았지만, 지환의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출근 준비를 한다. 빈속에서 새어 나오는 냄새를 양치질이 해결할 순 없지만, 성실히 이도 닦았다. 아침은 늘 시간이 촉박하니, 샴푸를 짜서 머리에 묻히되, 몇 번 문지르지 않고 물로 얼른 헹궈낸다. 향긋한 냄새만 풍기면 그만이지 싶은 마음에 생긴 버릇이기도 했다. 머리를 수건으로 탁탁 털어 말리고, 지환은 양치질을 할 때처럼 화장실 거울 앞에 다시 섰다. 거무튀튀한, 그러니까 한눈에 보아도 건강이 좋아보이지 않는 피부빛을 한 남자가서있다. 평생을 봐 온 얼굴인데도 지환은 때때로 자신의 얼굴이 낯설다. 거울 앞에 서서 지환은 자신이지만, 낯선 상대인 마주본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 그는 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해줄 것만 같은 기대 때문이다.
"저기요. 그런 생각 해본 적 있어요? 연차를 쓰기엔 눈치보이고. 아니, 그런 거 있잖아요. 손 많이 가고, 딱히 승진에는 별 도움될 것 같지 않은 일은 호구 잡힌 나한테 다 몰려 있고, 근데 그런 것들은 마감 주기가 되게 빠르단 말이죠. 매일 아니면 일주일에 한 번씩은 마감이니 제가 연차나 휴가를 쓸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지환은 목소리를 바꿔가며, 거울 앞 거무튀튀한 남자가 말하는 것처럼 자답한다.
"없겠지요. 아이고, 고생이 많습니다. 그래놓고 본인들 큰 프로-젝트가 있으면 회식 한답시고 사람을 밤새도록 붙잡아놓고. 집에 가면 의리 없는 놈이다, 뭐다, 욕 먹기 바쁘죠. 욕만 먹으면 다행이게요? 영양가 있는 중요한 자리에는 사람을 안불러준다는 말입니다. 승진은 꿈도 못 꾸는 거예요."
지환은 다시 목을 가다듬고 본인의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렇게 승진 누락되면 하는 소리가 또 가관입니다. 너는 처자식이 없지 않느냐. 이해를 좀 해줘라. 장 대리는 이번에 결혼하고 와이프가 임신을 했는데, 어쩌구 저쩌구. 아니, 승진을 해서 월급이나 어느 정도 돼야 처자식 만들게 결혼도 하고, 어? 대출 좀 많이 받아서 와이프랑 살 방 많은 집도 구하고, 어? 님을 봤으니까 뽕도 딴다 치면 이제 임신을 할 거 아닙니까. 그러면 염산인지 엽산인지 몸에 좋은 것도 멕이고요, 그래. 산후조리원이 비싸다던데, 2주에 한 달치 월급 다 털어넣어서라도 좋은 곳에 모시고."
지환은 이번엔 새침한듯 몸을 옆으로 기울여, 누굴 흉내내는지 모를 요염한 몸동작을 한다. 아마도 존재하지 않는 지환의 미래 와이프인 것 같다.
"저를 봐서라도, 지환씨 좀 덜 고생하게 해주세요. 호홍. 저희가 가족 계획이 있어서요. 호홍."
거무튀튀한 남자가 다시 등장한다.
"아니, 승진 하려고 결혼을 하는 것도 웃긴 거 아닙니까. 내 몸 하나 건사하면서 회사 다니는 것도 지금 죽을 맛인데. 와이프에 애까지? 게다가 저런 생각 없는 여자랑 결혼을 해서 무슨 꼴을 당하려고. 2년도 안돼서 갈라서니마니, 어렵게 마련한 집 재산 분할을 하니 마니, 양육권이 어쩌고. 인생 망치는 거예요."
지환이 다시 돌아온다.
"그냥 딱 일주일만, 아니 삼일만 쉬었으면 좋겠네요."
거무튀튀한 남자가 기발한 생각이 났다는 듯, 입가의 주름에 잔뜩 그림자를 만들며 웃는다.
"방법이 있지요."
"무슨 방법이요?"
"오늘 출근길에 경미한 교통 사고를 당하는 겁니다."
"아프지 않을까요? 너무 고통스러우면 어쩌죠?"
"그러니까 경.미.하다고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팔이 부러진다거나."
"저번에 국제팀 송 사원은 오른쪽 팔에 철심 박는 수술을 하고도, 출근을 했단 말입니다. 왼손으로 보고서 쓰고, 이메일 답장하고."
"그럼 다리는 어때요."
"목발 짚고 온 직원들 한 둘 본 것이 아닙니다."
"그럼 허리?"
"허리는 쉬는 게 아니라, 영영 회사를 그만둬야할 수도 있겠네요. 지금 집 월세에, 시발비용으로 최대 할부개월로 갚고 있는 자동차, 아이패드, 스마트TV... 그리고 요즘은 각종 구독료까지 내려면 회사를 그만두는 건 꿈도 꿀 수 없어요. 온갖 걸 다 구독하는데, 정수기, 침대, 에어컨... 넷플릭스, 쿠팡TV, 웨이브, 티빙에 디즈니플러스, 네이버 멤버십, 음악 들으려면 또 그것도 해야되고. 제가 아직 또 책을 좋아해서 밀리의 서재나..."
"그것 참 어렵네요. 아무튼 나는 요즘 간이 안좋아졌는지, 피곤해서. 출근 잘 하십시오."
화장실을 나온 지환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당황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다. 자칫하면 지각을 하게 될 지도 몰랐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집인데도, 사무실의 텁텁한 공기를 마시고 있는 것처럼 갑갑해져 오기 시작했다. 지환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마도 같은 약을 먹고 있을-아니 그러길 바라고 있는-의사의 조언이에 따른 것이었다. 조금 나아지자, 지환은 출근할 옷을 꺼내 입었다. 다른 부위는 헐거운 게 그대로인 것만 같은데, 바지 허리 둘레는 늘 늘어나는 것만 같다. 흡, 숨을 참고 버클을 채우고 다시 버클에서 손을 떼었다. 한 쪽을 누른 풍선처럼 둥글게 팽팽해진 뱃살이 셔츠 너머로 불거져 나왔다.
지환은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현관문을 열려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있는 힘껏 문을 열었는데 겨우 한뼘이 열렸다. 잠 못 이루던 지난 밤, 주문해두었던 새벽배송 택배가 겹겹이 쌓여 문을 막고 있었던 탓이었다. 개중엔 냉동 제품도 있을텐데, 지환은 잠시 생각했다가 택배 박스들을 문앞에 그대로 두고 몸만 간신히 빼내어 나왔다. 어차피 진짜 먹으려고 주문한 음식들도 아니었다. 5만 원 정도는 정신 건강을 위한 약값에 쓸 수 있다고, 그 정도도 쓰지 않으면 회사에 다닐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지환이었다.
오전 7시 30분이 지나자, 각종 이메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휴대폰이 끊임없이 진동했다. 메트로놈의 착착, 박자를 치는 소리처럼 규칙적인 것 같은 진동들 사이에서 지환은 직장인이기 전엔 없던 강박들이 생겨나는 것만 같았다. 지환은 [긴급]이라는 말머리를 붙인 이메일 수신함 팝업창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제 막 도착하는 버스를 잡아타야 간신히 지각을 면하지만, 메일을 빨리 확인해야할 것 같았다. 실제 출근은 9시이지만, 8시 30분, 아니 8시 20분을 넘겨 도착하면 안되니까. 참조가 아닌, 수신인이 '김지환'으로 지정된 메일이었다.
지환은 길 한가운데 멈춰서, 메일을 확인하려 휴대폰 잠금을 해제했다. 한 손으론 휴대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잠금을 해제 해야했기에,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은 잠금 해제하는 손의 새끼 손가락을 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걸어둔 상태였다. 이 기업에 취직했을 때, 전 애인이 선물로 주었던 비싼 가죽 가방이었다. 안에 든 것은 지갑과 서류 몇 장 뿐이지만 무거운 건 비싼 값이었다.
[긴급] 김지환 담당자님. 발주처 문제로 긴급 논의드립니다.
지환의 손이 떨려왔다. 긴급 논의란 것이 무엇인가. 오전 8시도 안 된 시간에, 과연 지환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이란 과연 있을까. 과장이나 부장 혹은 발주처의 대표에게 전화를 할 깜냥이 있을까. 무언가를 제안할 수 있을까. 무슨 논의인지 알지 못하지만 지환은 자신이 이 논의의 주체가 되기엔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에 대해선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지환이 무겁지만 비싼 가죽 가방을 새끼 손가락에 건 손을 힘겹게 들어올려, 그 보다 더 힘들어진 마음으로 메일 제목을 누르려는데, 좁은 골목을 서행 운전하던 차 한 대가 좌회전을 하며 들어오다 오른편에 있던 지환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이드미러에 지환의 가죽 가방을 걸어버렸다. 느린 속도로 달리는 차였기에, 지환은 아스팔트 위에 장례식장에서 절을 하는 속도로 천천히 고꾸라졌다. 브레이크를 밟은 차는 미끄러지지 않고 그 자리에 딱 멈춰섰다. 지환은 넘어지며 왼쪽 손바닥이 아스팔트 바닥에 쓸려 피가 났고, 그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은 액정이 완전히 깨져 망가져버렸다. 가방에 끌려 간 손가락은 약간의 골절이 의심될 정도로 통증이 있는 상황.
회사로 달려도 모자랄 시간에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게 된 지환은 헛웃음이 났다. 휴대폰을 확인하려 몸을 움직이려는데, 허리에도 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지환은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무언가 이룬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한 번도 당첨되어보진 못했지만, 복권에 당첨된 것 같은 그런 기분. 지환은 당황했을 운전자에게 오늘 아침의 일을 소상히 설명해주고 싶다. 가능하다면 자신이 회사에서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 그 수모 때문에 얼마나 회사에 가는게 곤욕이었는지. 사람을 친 운전자면 그 정도 이야기는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 뿐이다. 그 외의 바라는 것은 없다. 생각만해도 온몸이 노곤노곤 녹아버릴 것 같은 달콤한 입원이 다음 수순으로 남아 있지만.
운전석 쪽에서 문이 열리고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구두가 바닥에 닿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지환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아니, 김지환 담당자님 아니십니까. 괜찮으세요? 근데 왜 그러셨어요. 왜."
지환이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올려다봤다. 그림자 진 익명의 얼굴이 억울한 목소리를 냈다.
"제가 골목길 운전은 애들 튀어나오는 것 때문에 조심하는 편인데... 왜 제 차에다 가방을 걸고, 멀쩡한 휴대폰을 집어 던지셨는지. 이거 블랙박스에 다 찍혔습니다. 다치신 건 그런데, 저도 곤란해져서요."
액정이 깨진 휴대폰 디스플레이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지환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웃음은 그 소리를 계속 달리했다.
'출근길에 읽는 초단편'은 출근하는 마음으로 쓰고, 공개하는 짧은 시리즈 소설입니다.
돈 벌고, 먹고 사는 일에 관한 모든 수고들을 소재 삼아 써나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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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월화수목금 쓰고, 토일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