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동산리 히든 할매들과 만나다방> 9화
딸랑딸랑.
청량한 문종 소리에 주현은 잠에서 깼다.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테이블에 엎드려 잠깐 쉰다는 것이,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던 모양이었다. 몸이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렸다. 모래가 잔뜩 담긴 수레라도 양 어깨에 짊어진 것처럼, 천근만근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테이블 쪽을 향하도록 구부러져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은 뒷목을 채 펴지도 못한 채, 주현은 낮 동안 수없이 반복했던 말을 내뱉었다.
"... 어서 오세요."
두 사람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의견이 다른지 아웅다웅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잡아 끄는 것 같기도 했고, 그 때문에 마룻바닥에 발이 끌리거나 쿵, 하고 무겁게 떨어지는 발 구르는 소리도 들렸다. 주현은 뻣뻣한 뒷목을 한 손으로 붙잡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출입문 쪽을 바라봤다. 지난번 체육대회에서 만났던 석재와 그의 손을 잡은 작은 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석재의 손을 잡고 팽팽하게 제 팔을 늘리며 주현 쪽을 향해 다가오려 하고 있었고, 반대쪽 손에는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빠. 이모 아픈가 봐."
잠들기 전보다 훨씬 더 짙은 어둠이 창밖을 채우고 있었다. 통창은 외부의 세상을 여과 없이 통과하지 않았다. 마치 거울처럼 주현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었다. 한쪽으로 기대어 자느라 납작하게 눌린 앞머리와, 피곤에 찌든 퀭한 눈빛, 새우처럼 기역자로 구부러진 채 펴지 못한 몸까지. 주현은 테이블 위에 흘린 침을 옷소매로 몰래 닦으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마감하고 쉬시는데, 괜히 찾아와서 귀찮게 했네요."
고개를 가로저으려는데, 뒷목 부근에서 뭉친 근육에서 팽팽하게 당겨오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주현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석재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뒷걸음질 쳤고, 아이도 석재의 손을 꽉 붙들었다. 둘인 각자의 손에 들고 온 것을, 출입문과 가까운 쪽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은색 스텐 그릇 위에 맺힌 물방울이 곡선을 타고 흘러내려 금세 테이블과 그릇 사이에 고여 둥근 띠를 만들었다. 아이는 플라스틱 바구니를 올려두고선, 안에 든 것을 꺼내 제 입으로 한 움큼 집어넣었다. 산딸기였다.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보낼 수 없었다. 남아 있는 힘을 짜내 몸을 일으켰다. 하루종일 서있느라 피로해진 발바닥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중심을 잡지 못한 주현이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었다. 막 걸음마를 배우는 초식 동물처럼 좌우로 흔들흔들, 손님을 향해 걸어갔다. 입에 산딸기를 가득 넣은 아이가 뭉개진 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모는 좀비야?"
주현은 출입문을 나서려는 둘을 간신히 붙잡아 테이블에 앉혔다. 주현은 그들 앞에 마주 앉은 뒤에도, 얼굴에 묻은 피곤이라도 닦아내려는 듯 몇 번이고 마른세수를 했다. 석재는 주현 가까이로 그릇을 밀었다. 그릇이 이동한 자리에 물자국이 남았다.
"오징어 물회네요?"
영춘이 주현에게 가져다주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꼼꼼하게 랩핑이 된 그릇 아래엔 곱게 갈린 살얼음 국물이 파도처럼 찰랑거렸다. 꼬르륵. 물회를 보자 주현의 배가 먼저 반응했다. 갑자기 배에 큰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허기가 밀려 들어왔다.
"정신없어서 식사도 못 챙기셨을 것 같아서."
"좀비 이모! 할머니 물회 진짜 맛있어요."
"다운아, 사장님한테 좀비라니...."
다그치는 석재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다운은 산딸기를 입에 가득 넣고 우물거리며 주현의 옆으로 와 가벼운 몸을 날려 털썩 앉았다. 손에 쥔 스마트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주현의 몸에 등을 기댔다. 원래 아이들은 다 이런 건가. 주현은 다운이 신기했다. 온통 의심과 경계뿐이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토막잠을 자는 동안 냉랭하게 식은 주현의 몸에, 여름밤을 가르며 걸어왔을 아이의 말랑하고 따끈한 찐빵 같은 감촉이 전해졌다.
석재는 메고 온 가방에서 수저와 참기름, 식초를 차례로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그릇을 덮고 있는 랩을 벗겨냈다. 아주 느린 속도로 참기름과 식초를 번갈아가며 한 바퀴 씩 둘렀다. 주현에게 어서 먹어보라는 듯 손짓했다. 다운도 휴대폰을 잠시 내려놓고 주현을 바라봤다. 동그란 두 눈이 무척 닮은 부녀였다. 주현이 물회를 크게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역시나 황홀한 맛이었고, 주현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식초의 새콤한 맛이 더해져, 주현의 피로를 한 번에 싹 씻어내는 듯했다.
"편하게 드시라고. 그릇은 다음에 가져다주세요."
석재가 산딸기 때문에 입가가 붉게 물든 다운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채 썬 당근과 오이를 다급히 씹어 삼키며 주현이 둘을 붙잡았다.
"오픈 첫날 오셨는데, 아무것도 안 드시고 가면 안 되죠. 잠시만 계셔 보세요."
주현은 그릇을 통째로 들고 국물을 쭉 들이켰다. 살얼음이 띄워진 시원하고 얼큰한 국물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바닥에 남은 밥알과 채소, 오징어 회를 싹싹 긁어먹었다. 짧은 속트림을 하고, 주현은 서둘러 주방으로 갔다. 커피를 담았던 보온병이 텅 비었다. 물을 다시 끓이고, 커피와 설탕과 프림을 비율에 맞춰 넣은 최주현 스페셜을 금세 만들어냈다.
"아직 다운이 네가 마실 게 없어서 어쩌나."
주현이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운이 빵빵하게 부푼 배를 두드리며, 전혀 서운하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석재가 대신 다운이 오늘 하루동안 먹은 것들을 나열했다. 이 작은 몸으로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산딸기가 아니었더라면 복자상점에 세 번은 갔을 거라며, 석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좀비 이모, 저는 엄청 유명한 유튜버가 될 거거든요. 이모도 출연해 주실 거죠?"
다운이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주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채널명은 '동산리 오다운TV'. 구독자는 9명에 불과했지만, 영상은 10개 가까이 업로드되어 있었다. 다운은 최근 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영상 속에서 길자가 카메라를 향해 양손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흔드는 것이 첫 장면이었다. 다운이 재촉하자, 길자는 귀찮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가게 앞에 놓여 있던 커다란 오징어 수조 위의 묵직한 뚜껑을 번쩍 들어 올렸다. 수조 속을 헤엄치던 오징어 한 마리를 뜰채도 없이 손으로 휙 낚아채더니, 그대로 도마 위로 정확히 던졌다. 자칫 둔해 보일 수도 있을 두꺼운 팔 근육으로, 길자는 누구보다 섬세하고 가볍게 칼을 움직이며 오징어를 채 썰었다. 다음 장면은 얇게 썬 오징어 회로 줌인. 배경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게 얇게 썬 오징어 회가 반짝였다. 초등학교 2학년, 고작 9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솜씨 치고 꽤 잘 편집된 영상이었다.
"요즘 애들은 빨라요. 어디서 배웠는지 영상도 편집해서 척척 올리고."
“유튜브는 뭐 하나. 이런 영상 알고리즘에 안 태우고.”
다운은 주현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신이 나서 다음 영상과 그다음 영상도 보여주었다. 복자가 커다란 통나무를 들고 체조를 하는 영상, 영춘이 커다란 나무를 깎고, 이어 붙여 거대한 구조물을 만드는 영상, 원주가 강렬한 색감의 '라바 오렌지 색'의 스포츠카를 타고 해변을 달리는 영상…. 다운의 시선으로 담아낸 동산리 마을 할머니들 영상이 주를 이뤘다. 주현은 영상 목록의 가장 아래쪽에 있는 한 영상에 시선이 머물렀다. 썸네일에는 만나다방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김명희의 얼굴이 있었다.
“아, 명희 할머니 영상은 좀 그런데...."
다운이 머뭇거렸다. 석재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현은 명희와 관련해서는 애틋함이나 그리움 따위 남아있을 리 없었기에, 아무렇지 않았다.
"난 괜찮아. 어떤 분이셨는지 잘 모르거든."
"제가 안 괜찮아서요. 이건 1학년 때 찍었던 거라, 핸드폰도 더 옛날 거고 편집도 별로란 말이에요."
다운은 산딸기처럼 붉어진 얼굴로 영상을 재생했다. 김명희의 나긋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주현은 이 목소리를 본능이 기억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김명희는 다운을 위한 음료를 만들고 있었다. 영상 속 주인공인 김명희보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을 다운의 목소리와 숨소리가 훨씬 더 크게 들려왔다.
“짠! 이게 오다운 스페셜이야. 어때?”
촬영하던 휴대전화를 바닥에 팽개쳐두었는지, 영상이 검게 바뀌었다. 까만 화면 속에서 다운이 음료를 보고 감탄하는 소리, 명희의 얼른 맛을 보라는 목소리, 문종이 울리며 영춘이 명희에게 안부를 묻는 목소리, 두콩이 사람들을 반기며 멀리서 짖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주현은 영상에서 눈을 떼고, 만나다방을 둘러보았다. 다운이 작년에 찍어두었던 영상에서 바뀐 건 사장이 김명희에서 최주현이 되었다는 것뿐인데, 어쩐지 모든 게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희 할머니가 아주 멀리 여행을 가서, 좀비 이모가 여기 온 거죠?"
석재는 괜히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이곳저곳을 구경하려는 듯 어슬렁거렸다. 아마도, 하고 주현이 대답하자 다운이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행 가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은, 여행 간 사람들보다 더 재밌게 지내야 된댔어요."
다운은 제 말을 마치고, 갑자기 쑥스러움이라도 느낀 사람처럼 석재가 있는 곳으로 우다다 발소리를 내며 뛰어갔다. 둘은 아주 오랜만에 만난 애틋한 사람들처럼 서로를 반가워했다. 다운은 새끼 코알라처럼 석재의 등에 매달려 한참을 달라붙어 있었다.
“첫날이잖아요.”
괜찮다고 하는데도, 석재는 기어이 주현의 마감 청소를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다운도 오징어 물회집 손녀답게 제법 능숙하게 빗자루질을 했다. 영원히 지치지 않을 것처럼, 다방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온갖 작은 것을 발견하고 참견하던 다운은 청소 시작 20분도 안되어 다방 가운데 있는 가장 긴 소파에 빗자루를 안은 채 잠들었다. 석재는 타고 온 트럭에서 무릎담요 하나를 가져와 잠든 다운 위에 살며시 덮어주었다.
"진짜 잠든 거예요?"
“애들은 거짓말 같이 잠들죠.”
“신기해요.”
“잠드는 게요?”
“그것도 그렇고. 아빠랑 딸이 세상에 둘만 있는 것처럼 잘 지내는 게요."
"소영이가 하늘나라에 가고, 다운이랑 둘만 세상에 남겨진 것도 맞으니까. 매일 밤 잠든 애 얼굴 보면서 울었어요. 한국 생활 다 정리하고, 태국에 돌아갈 준비도 했어요. 다운이 할머니가 동산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떻게 지냈을지 상상도 잘 안되네요."
주현은 냉장고로 향했다. 전날 복자상점에서 사두었던 막걸리가 있었다. 가게 오픈을 하며 고사를 지내지 않을까 생각해서 사둔 것이었다. 마땅히 어울리는 잔이 없어 커피잔 두 개를 가지고 와 테이블 위에 놓았다. 막걸리 뚜껑을 손에 힘을 주어 돌리자 칙, 하는 탄산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포말 같은 거품이 넘칠 듯 차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대단해요."
"잘하는 것 같아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엉망이에요. 아빠가 저래도 되나, 할 걸요."
주현과 석재는 목적 없는 이야기를 참 길게도 나누었다. 석재가 태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으로 꼽히는 쭐랄롱꼰 대학에 입학했던 이야기를 하면, 주현은 간신히 고등학교 졸업장을 딸 수 있었던 모험담을 들려주었다. 주현이 만나던 남자에게서 배신당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석재는 여섯 살 연상 한국 여자에 사랑에 빠져, 가족과 연을 끊은 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이야기를 남의 일처럼 얘기했다. 석재가 소영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자, 주현은 죽은 것처럼 숨죽이며 살았던 지난 시간들 중 몇몇 장면들을 이야기했다. 순서도 없고, 정해진 규칙도 없는 주제의 이야기들이 테이블 위를 오갔다. 둘은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그래서 서로의 인생을 더 존중하는 마음이 되었고, 어떤 부분에선 위로가 됐다. 지난 하루의 고단함을 잊었고,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잊어버렸다.
저 멀리 수평선 위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며, 은은하고 창백한 푸른빛이 바닷물 위로 서서히 번져 나갈 때가 되어서야 석재는 잠든 다운을 등에 조심스럽게 업었다. 손끝에 빨갛게 산딸기 물이 든 다운과 석재를 주현이 배웅했다. 잠에서 깬 두콩이 졸린 눈을 하고서 주현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주현도 길게 이어지는 하품을 하며, 출입문에 달린 손바닥만 한 팻말을 '영업 종료'로 뒤집었다.
"정다운 스페셜: 레인보우 베리 스무디"
다양한 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정다운을 닮은 음료. 제철 베리류의 신선한 맛과 알록달록한 색감을 자랑하는 스무디!
산딸기, 파인애플, 블루베리, 요거트, 꿀, 얼음
각 과일을 요거트와 적절히 섞어 꿀과 얼음을 넣고 부드럽게 갈아준다. 단, 각각의 과일들은 섞지 않고 따로 갈아주는 것이 핵심. 다양한 색의 과일 요거트가 층층이 쌓일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유리컵에 따라준다.
"석재 스페셜: 코코넛 칵테일 막걸리"
태국과 한국의 문화를 잇는 퓨전 음료. 코코넛의 달콤함과 막걸리의 풍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막걸리, 코코넛 밀크, 코코넛 설탕, 얼음
막걸리와 코코넛 밀크를 섞고 코코넛 설탕을 넣는다. 얼음을 넉넉하게 넣은 유리컵에 천천히 부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