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슬기 Oct 25. 2024

"오늘의 사브레는 내일로 미룰 수 없는 법.”

소설 <동산리 히든 할매들과 만나다방> 7화

100만 잔 팔린 시그니처 자몽 메뉴 만들기

4가지 비법만 알면 누구나 세계대회 1등 바리스타 된다

상금 1억 받은 카페 음료 레시피 공개

남녀노소 누구나 단골 되는 카페 음료 BEST5


유튜브에는 온갖 비법들이 가득했다. 주현은 콘텐츠를 인기순으로 정렬해 두고, '좋아요'가 많은 순서대로 하나씩 재생하기 시작했다. 인기 동영상 중 무려 세 개의 영상이 상위권에 있는 채널의 운영자는 손가락이 유독 희고 길었다. 주현은 그 채널이 마음에 들었다. 서울에서 인기 있는 카페 세레노를 운영한다는 유튜버의 마지막 멘트는 주현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모두 성공하는 카페 사장님 되세요. 안녕!"


100만 잔, 1억, 1등, 누구나 단골. 자극적인 단어들이 주현과 무척 가까워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만나다방을 운영하다가 너무 장사가 잘되면 어떡하지. 유명해지는 바람에 패션 매거진 같은 곳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면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 체인점을 내면 일하지 않고도 돈 벌 수 있는 것 아닌가. 돈을 잔뜩 벌면 서울 중심에 있는 아파트 한 채를 사야지. 온갖 생각이 피어올랐다. 그동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뒷걸음질 치는 것만 같은 인생이었는데 주현은 이런 인생에도 전환점이라는 게 생긴 것은 아닐까 기대했다.


새로운 영상이 화면 위에 떠올랐다. 카페 세레노 사장은 높이가 10센티미터 남짓 되는 것으로 보이는 온더락잔을 꺼내 들었다. 매끄럽고 두툼한 유리로 된 잔을 손끝으로 챙챙, 소리가 나도록 두드렸다. 영상은 빠르게 편집돼, 각기 다른 맛과 색을 내는 재료들이 층을 만들며 쌓였다. 여자는 손바닥 높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잔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카메라 가까이 가져다 댔다.


"임페리얼 바닐라 에스프레소 위드 골드 더스트 초콜릿 인퓨즈드, 완성! 모두 성공하는 카페 사장님 되세요. 안녕!"


주현은 만나다방의 문을 열게 되면, 명희의 방식대로 메뉴를 만들고 운영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주현만의 비법 레시피로 만든 '최주현 스페셜'이 가장 먼저 필요했다. 처음엔 막막했지만, 카페 세레노 사장의 영상을 보고 난 뒤엔 달랐다. 그녀처럼 뚝딱뚝딱 가볍게 음료를 만들고, 멋지게 한 잔 내놓으면 금세 성공에 가까워질 것만 같았다. 주현은 영상에서 배경음으로 쓰였던 노래를, 제 방식대로 아무렇게나 따라 부르며 주방으로 향했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프림, 반쯤 남은 백설탕과 커피가루. 그리고 맥심 모카골드 믹스커피 스틱 두 개.


만나다방에 남아 있는 재료는 이게 전부였다. 주방 찬장과 선반, 창고와 업소용 냉장고 심지어 2층 부엌까지 샅샅이 뒤져 남아 있는 모든 재료를 꺼냈는데도 그랬다. 엄밀히 말하면 명희가 다방을 운영하며 남긴 재료가 아니라, 명희의 죽음 뒤 집 정리를 대신한 누군가가 마시다가 남긴 커피 재료 정도에 불과했다. 초장부터 김이 팍 샌 주현의 코에서 흘러나오던 작곡 미상의 노래도 뚝 끊겼다.


주현은 텅 빈 주방 가운데를 빙글빙글 의미 없이 돌았다. 영상 속 카페 사장들은 '있는 재료'를 꺼내 척척 무언가를 만들기만 했지, 그 재료를 어떻게 찾고 구하는지 알려주진 않았다. 마다가스카르 바닐라 빈, 예멘산 모카 마타리 커피 원두, 식용 금가루, 벨기에산 다크 초콜릿, 사프란 시럽, 유기농 아몬드 밀크 같은 재료는 도대체 왜 그 냉장고에 평범한 재료로 들어가 있는지 주현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작은 원을 그리며 도는 주현의 뒤를 두콩이 잡기놀이를 하듯 쫓다가, 금세 흥미를 잃었는지 출입문 앞에 놓인 방석 위에 가서 엎드렸다. 두콩이 드르렁, 코를 골기 시작 할 때쯤 주현은 쉽지만, 실패 없는 그리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방법 하나를 떠올렸다.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기는 바람에 잠에서 깬 두콩이 느리게 끔뻑거렸다.


“굴지의 대기업을 벤치마킹하자.”


주현은 키친타월 세 칸을 뜯어 조리대 위에 평평하게 펼쳤다. 그 위에 맥심 모카골드 믹스커피 한 봉지를 까서 조심스럽게 부었다. 요리 집기가 어지럽게 꽂혀 있는 통에서 요리용 핀셋을 찾아,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집어 들었다. 조리대 가까이에 바 테이블 의자를 가져다 놓고, 믹스커피 가루 위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핀셋으로 입자가 가장 굵은 커피가루부터 골라내 한쪽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흰 바탕에서 진갈색의 커피 가루를 찾아내 집어내는 일은 생각보다 할 만했다. 집중했더니 30분 만에 커피 알갱이를 모두 집어냈다. 문제는 설탕과 프림이었다. 입자 크기가 확연히 차이 나긴 했지만, 하나하나 집어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주현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핀셋이 손끝의 신경과 연결된 것 같은 예민한 감각이 느껴졌다. 엄숙하지만 치열한 현장에서 주현은 12그램짜리 믹스커피 한 봉지를 3시간 동안 성분에 따라 분리했다. 키친타월 위에 세 개의 각기 다른 색의 작은 무덤이 둥글게 쌓였다.


주현은 저울을 꺼내 커피, 설탕, 프림 각각의 무게를 쟀다. 집념으로 알아낸 커피믹스의 비율을 메모지에 옮겨적고, 커피포트에 물을 부어 끓이기 시작했다. 온더락 잔은 없지만, 종이컵 크기의 크림색 손잡이가 달린 도자기 잔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대기업 믹스커피의 비율을 기본으로 주현은 설탕과 커피, 프림의 양을 조금씩 달리하며 여러 잔의 커피를 만들고 맛을 보았다. 시도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주현이 원하는 맛에 가까워졌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입맛에 꼭 맞는 비율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주현은 세숫대야 크기의 대야 하나를 꺼내 조리대 위에 올렸다. '최주현 스페셜' 비율에 맞게 커피와 설탕과 프림을 넣었다. 물은 커다란 곰솥에 끓여 부었고, 손잡이가 긴 업소용 국자로 가루가 잘 녹을 수 있게 고루 휘저었다. 소용돌이 속에서 점점이 박힌 커피가루가 서서히 녹아들어 갔다. 달큼하고 진한 커피 향이 다방 전체에 번져 나갔다. 주현은 찬장에 보관돼 있던 에메랄드색 대형 보온병과 노란색 깔때기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 '최주현 스페셜'을 조심스럽게 따라 부었다.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단단히 뚜껑을 닫고, 보온병에 달린 가죽끈을 어깨에 둘러메며 주현이 혼잣말을 했다.


"배달은 더 자신 있지!"


주현은 집 뒤편으로 난 바퀴 자국을 눈여겨 본 적 있었다. 배달용 오토바이 치고는 바퀴 폭이 넓어 보였지만, 분명 오토바이가 맞았다. 주현은 보온병의 온기를 느끼며, 건물 뒤편 차고로 향했다. 세월이 느껴지는 회색 셔터가 굳게 닫힌 차고였다. 셔터 아래쪽엔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녹슨 열쇠도 그대로 꽂혀 있었다. 주현은 조심스럽게 열쇠를 돌려, 자물쇠를 열고 힘껏 문을 밀어 올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보온병을 툭, 떨어뜨렸다.


"... 할리데이비슨 팻보이!"


주현이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던, 드림 바이크. 주현은 바닥에 떨어뜨린 보온병을 주워서 안아 들고 차고 안으로 홀린 듯 걸어갔다.


바이크는 금방이라도 성난 황소처럼 차고 벽을 뚫고 뛰쳐나갈 것 같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거대한 강철 덩어리가 늦은 오후의 햇빛에 금빛으로 번쩍이는 듯했고, 직선과 곡선이 날렵하게 이어지면서도 그 모든 것들이 조화되어 묵직한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 주현은 차마 바이크에 손 한 번 대보지 못하고 주위를 몇 바퀴가 돌아보았다.


“이 멋진 아이를 배달용으로 썼다고?”


주현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바이크에 남은 흔적은 이것이 오랜 시간 배달용으로 쓰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만나다방=신속배달!' 바이크 양옆과 뒤 쪽엔 멋없는 홍보용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만나다방의 유선전화로 연결되는 전화번호도 바이크 왼편에 궁서체로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었다. 자신의 드림 바이크가, 이곳에서 고작 배달용으로 쓰였다는 사실에 주현은 대신해 바이크에게 사과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멀게만 느껴지던 바이크가 배달용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무척 가깝고도 친근하게 느껴진 것 역시 사실이었다. 뒷좌석에 개조된 배달용 짐칸에 주현은 보온병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실례하겠습니다.”


바이크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으릉으릉, 하는 바이크의 위협적일 정도로 낮은 울음소리가 차고 안을 가득 채웠다. 바이크의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주현은 눈물이 찔끔 날 지경이었다. 심장이 요동치는 바람에, 마치 오토바이를 처음 운전할 때처럼 긴장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바이크 핸들에는 실드가 없는 오픈 페이스 형태의 헬멧이 걸려 있었다. 헬멧에도 어김없이 신속배달을 약속하는 만나다방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스티커가 브랜드 로고를 정확하게 가려 잘 알아보기 힘들 수도 있으나, 주현은 단박에 알아보았다. 한 때 바이크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던 고가의 브랜드의 것이 분명했다. 헬멧은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머리에 잘 맞았다.


두 팔을 번쩍 들어 핸들을 꽉 붙잡았다. 할리데이비슨의 트레이드마크로 개조된 ‘만세 핸들’이었다. 두 팔을 든 자세가 불편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편안했다. 오른쪽 핸들바에 있는 가속 레버를 당겼다. 어흥, 엔진 소리를 내며 탄성 좋은 뒷다리를 가진 야생 동물처럼 빠른 속도로 앞으로 움직였다. 차고를 벗어난 바이크는 금세 길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 나갔다. 안정적인 속도에 접어든 바이크 위에서, 주현은 만세를 하듯 활짝 열어둔 겨드랑이 사이로 느껴지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즐겼다. 오른쪽으로 동산리의 푸른 바다가 주현과 함께 달리듯 계속해서 이어졌다.


동산리 스타디움이 있는 능만산 초입에는 너른 마당이 있는 마을 회관이 있고, 영춘의 집은 마을 회관의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담이 낮아 얼핏 보면 영춘의 집이 마을 회관의 별채처럼 보일 정도다. 걸어서는 30분이 훨씬 넘게 걸린 거리였지만, 바이크로는 5분도 채 되지 않아 주현은 영춘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당 한 편에 바이크를 주차해 두고, 보온병을 챙겼다. 영춘의 집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영춘 어르신, 계세요?”


주현은 열린 문 사이로 고개만 들이밀고 영춘을 불렀다.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계세요오?"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불러 보았다. 되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영춘이 낮잠이라도 자고 있어 주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닐까. 주현은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집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주현은 거실 한복판에서 포징 수트를 입고, 구릿빛으로 그을린 피부를 드러낸 영춘과 마주쳤다. 실제의 영춘은 아니고, 커다란 액자에 실제의 영춘과 같은 비율로 인쇄된 사진 속 영춘이었다. 사진 속 영춘은 지금보다 10년쯤 더 젊어 보였다. 10년 젊은 영춘은 손바닥 크기도 안 되는 하의에, 병뚜껑 크기 정도의 면적으로 가슴을 가린 상의를 입고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영춘 옆에 또 영춘, 그 옆에 또 영춘. 집 안에는 온통 영춘의 사진뿐이었다. 할머니 혼자 사는 집, 하면 으레 있을 법한 장성한 자식들의 결혼사진이나 꽤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손자 손녀의 스튜디오 사진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온통 영춘의 독사진이거나, 동산리 마을 행사에 영춘이 포함된 단체 사진이었다.


"집이 아니라 박물관이네, 왕영춘 박물관."


현관문과 가까운 쪽 방에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맞춤 제작을 한 듯한 유리 진열장이 있고 그 안에는 트로피와 상패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마저도 자리가 모자랐는지, 최근에 받은 체육대회 트로피는 바닥에 놓여 있는 상태였다. 주현은 영춘의 감사장과 임명장, 트로피와 상패에 적힌 문구를 조금 읽다가 다시 거실로 나왔다.


- 출장 중! 찾지 마시오. 이미 찾으러 온 것일 테지만.


거실 가운데 낮은 테이블 위에는 급히 휘갈겨 쓴 듯한 메모가 놓여 있었다. 자신을 찾으러 온 사람에게 남기는 메시지를 현관문 앞도 아니고, 거실 한가운데 남기는 사람이 또 있을까. 주현은 동산리에 와서 겪은 지난 일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봤다.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지금 이 상황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일은 낭비적인 일처럼 여겨졌다. 주현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펜 하나를 들고, 영춘이 남긴 메모 아래쪽에 글을 써두었다.


- 만나다방 이제 문 열려고요.


*


영춘의 집에서 나와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주현은 해안 도로를 향해 무작정 내달렸다.


"와아!"


속도를 높이다가, 주현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쳤다. 도로 위를 달린다는 게 이렇게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니. 100cc 배달용 오토바이로 달리는 것과 1800cc가 훌쩍 넘는 바이크로 달린다는 게 이토록 다를 줄은 몰랐다. 거리가 완전히 새롭게 보였다. 주현이 달렸던 이전의 거리는 온몸의 긴장을 단 한 시도 풀 수 없는 곳이었다. 강한 것들 사이에서 약해 보이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때로는 발악에 가까운 태도를 기본값으로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드림 바이크 위에서의 주현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어디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이따금 낮게 으르렁거리기만 해도 되는 그런 강인한 존재가!


바다를 등지고, 좁고 울퉁불퉁한 길로 접어들었다. 양팔 사이로 숲에 고여 있던 서늘한 공기가 스쳐 지나갔다. 처음 보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어, 더 좁은 길로 접어들자 멀지 않은 곳에서 통나무로 만든 작은 집 한 채가 보였다. 마치 주현이 이곳에 올 것으로 알기라도 한 듯, 누군가 이리오라는 듯 손짓을 하고 있었다. 엔진 소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주현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다가갔다. 통나무 집에는 ‘복자상점’이라 적힌 오래된 간판이 붙어 있었다.


“뽀이 소리가 들려서, 명희가 왔네 하고 나왔어. 내 정신 좀 봐. 명희는 이제 없는데."


아흔다섯, 복자는 복자상점의 주인이었다. 150센티미터 남짓한 작은 키에 바위처럼 단단하고 건강한 몸을 지닌 복자는 얼굴의 모든 주름을 이용해 웃는 사람처럼 보였다. 웃음이 깊을 수도 있다는 걸 주현은 처음 알았다. 영춘이나 길자 같은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할머니들에 비해 훨씬 더 나이가 많은 이유도 있었지만, 복자는 어딘지 모르게 푸근하고 편안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벌써 배달을 다 하고. 바쁘지 않으면 잠깐 쉬다 가요.”


복자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뒷짐을 진 채 앞장섰다. 주현은 바이크를 세워두고 복자를 따라 걸었다. 이른 새벽 내린 비로, 그늘진 길은 여전히 질퍽한 진흙이 밟혔다. 주현은 밑창 모양으로 선명하게 새겨지는 제 발자국을 보다가, 앞서 가는 복자의 발밑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귀신일까?'


주현은 바이크에서 챙겨 온 보온병을 품 안에 꽉 끌어안았다. 따끈한 보온병이 깊은 산속의 유일한 의지할 곳이었다. 주현은 앞서 가는 복자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따라가는 속도를 늦췄다. 사뿐한 걸음으로 앞서 가는 복자와의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졌을 때쯤, 주현은 뒤를 돌았다. 그리곤 눈을 질끈 감고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세워둔 바이크 바로 앞에 도착했을 때, 주현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놀라 그대로 주저앉았다. 복자가 어느새 주현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바... 발자국이... 귀, 귀신. 그러니까...."


복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듯하더니, 이내 곱게 주름진 웃음을 띤 얼굴이 됐다.


"내가 동산리서 제일 맏언니기는 해도, 아직은 귀신 아니니 걱정 말아요."


복자는 주현 보란 듯, 진흙 바닥 위에 꾸욱 힘을 주어 발자국을 만들어 보였다. 진흙이 엉덩이에 잔뜩 묻은 채 일어나 주현은 복자를 따라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겼다.


복자는 상점 앞 평상을 손으로 가리켰다. 주현은 엉덩이 끝만 살짝 걸치고 앉았다. 복자는 상점 안으로 들어가더니, 신축성이 좋은 몸빼 바지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바지를 받아 든 주현이 끌어안고 있던 보온병을 복자 앞으로 내밀었다. 주현이 주변을 둘러보며 주섬주섬 바지를 갈아입는 동안, 복자는 다시 상점으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가 쟁반에 빈 머그컵 두 개와 과자 한 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최주현 스페셜이에요."


주현이 보온병 뚜껑을 힘껏 돌려 열었다. 방금 끓인 것처럼 뜨거운 수증기가 주현의 얼굴 위로 훅 끼쳐왔다. 축축한 흙냄새와 풀 냄새가 가득한 곳에, 커피의 인공적이고 그윽한 향이 조화롭게 번져갔다. 크기와 모양이 다른 두 개의 머그컵에 천천히 '최주현 스페셜'을 따랐다. 복자는 자신과 가까운 쪽의 머그컵 하나를 집어 들고, 입 가까이 가져가 천천히 한 모금을 들이켰다.


"만나다방도 곧 문을 열겠네요."

"제 입맛에 맞게 커피를 만들긴 했는데, 이걸로 장사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만나다방은 음료만 파는 곳은 아니니까. 잘할 거예요. 그나저나 내가 미안한 부탁을 하나 해야겠는데."

"무슨 부탁이요?"

"너무 맛있어서 한 잔을 벌써 다 마셨네. 사브레랑 같이 먹게 한 잔 더 줘봐요."


복자는 정말로 미안한 부탁을 하려는 사람처럼, 눈썹과 어깨와 등을 구부리며 말했다. 주현은 복자보다 더 둥글어져야 할 것만 같았다. 키가 작은 복자보다 더 낮게 몸을 낮추고, 두 손으로 '최주현 스페셜'을 복자의 컵 위에 따랐다.


복자는 노란 글씨로 '사브레'라 적힌 네모난 과자 상자를 집어 들었다. 가장 바깥쪽 포장지를 벗겨내고, 흰색 받침대 부분을 당기니 잘 정리된 서랍에 넣어둔 것처럼 층층이 쌓인 황금빛의 둥근 쿠키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복자는 사브레 하나를 집어 들어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두 번을 씹어 입 안에서 조각을 나눈 뒤 그 위에 커피를 흘려보냈다. 주현도 복자를 그대로 따라 해 보았다. 사브레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씹으니, 버석하게 부서져 모래처럼 흩어졌다. 커피를 들이켰다. 버터가 듬뿍 들어간 사브레는, 따뜻한 커피에 부드럽게 녹아 풍미가 더 높아진 듯했다.


"맛있다!"

"최주현 스페셜도 딱 그래요."


둘은 나란히 앉아 키가 큰 나무를 바라보며 사브레 한 상자를 금세 먹어 치웠다.


"한 상자 더?"


복자가 물었고, 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사브레는 내일로 미룰 수 없는 법.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게 인생인데, 안 그래요?”


 아흔 다섯 복자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최주현 스페셜: 대기업이 생각나는 대야 믹스커피"

대기업 커피믹스의 비밀을 집념으로 밝혀낸 주현이 만든 특별한 커피. 마을 사람들 누구와도 나누어도 좋을 따뜻하고 달콤한 대용량 믹스커피.

커피:설탕:프림=2:6:3

대형 대야에 커피가루, 설탕, 프림을 비율에 맞게 넣고, 커다란 곰솥에 끓인 물을 부어 잘 섞는다. 완성된 커피를 대형 보온병에 조심스럽게 따라 보관한다.


"금복자 스페셜: 사브레 크럼블 밀크셰이크"

금복자의 따뜻하고 지혜로운 성격을 담아낸 음료. 사브레 과자의 고소한 맛과 밀크셰이크의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는 달콤한 음료로, 마을의 지혜를 나누는 시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우유, 사브레 과자, 꿀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우유, 잘게 부순 사브레, 꿀을 믹서에 넣고 부드럽게 갈아준다. 완성된 밀크셰이크를 컵에 담고 사브레 조각으로 장식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