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슬기 Oct 26. 2024

"새로 오신 아줌마 사장님"

소설 <동산리 히든 할매들과 만나다방> 8화

만나다방에 크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두콩은 그림자와 빛 경계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며 뛰어놀다가, 제풀에 지쳐 머리는 그림자 진 부분에, 목 아랫부분은 햇볕에 두고 단잠에 빠져 들었다. 주현은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허리에 양손을 받치고 고개를 한껏 젖혀 '거대한 것'의 끝을 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끝에는 영춘이 위태롭게 매달린 채, 사람 몸집보다 큰 은색 미러볼을 걸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제 다 됐어!”


영춘이 손을 탁탁 털고, 3층 건물 높이의 구조물에서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단단한 고리 끝에 걸린 미러볼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돌며, 빛을 조각내 사방에 크고 작은 무늬를 만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두콩이 빛의 조각을 쫓는 놀이에 금방 한눈이 팔렸다. 금세 헥헥, 두콩의 숨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과하지 않나요?”


주현이 고개를 젖히고, 아랫배에 잔뜩 힘을 주며 소리치듯 말했다. 영춘은 가볍게 구조물 이곳저곳을 좌우로 넘나들며 내려오다가, 마지막 2미터쯤을 남겨두곤 두 발을 모아 아래로 가뿐하게 뛰어내렸다.


"동산리에선 이것도 작은 거야. 길자 오징어 물회집 40년 만에 리모델링하고 재오픈했을 때는, 화환이 15미터였어."


영춘은 해도 뜨기 전인 이른 아침, 10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화환'을 등에 지고 만나다방 마당에 쿵쿵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놀란 두콩이 짖어대는 바람에 주현도 잠에서 일찍 깨었다. 영춘은 만나다방 문을 다시 여는 첫날인데, 사장이 피곤하면 쓰겠냐며 주현을 2층 방으로 올려 보냈지만 주현은 잠을 더 이룰 수 없었다. 땅을 파는 소리, 망치질을 하는 소리, 무거운 무언가를 들어 올리면서 우렁차게 기합을 넣는 소리 등 각종 소음들이 주현을 괴롭혔다.


“가게 문을 열었는데, 화환이 없으면 쓰나.”


영춘은 화환의 기둥이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용 말뚝을 힘껏 두드렸다. 그 위로 굵은 로프를 감고 화환을 단단히 고정했다. 주현도 도울 일을 찾다가, 바람이 불 때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지점을 찾아내 로프를 몇 번 더 감는 작업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화환은 처음부터 마당에 있었던 것처럼, 뿌리를 내린 듯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 


주현은 연말이면 대형 백화점이나 광장 앞에 자리를 잡고 몸을 반짝이던 크리스마스트리를 떠올렸다. 주현의 마당에 있는 화환과 그 크기가 별 차이가 없을 듯했다. 주현은 그런 류의 화려함에 별 감흥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리 보고 싶지 않은데, 너무 자주 봐서 그렇다고 주현은 생각했다. 연말이면 배달 콜수가 늘었다. 자연스럽게 번화가 근처를 자주 오가게 됐고, 하루에 몇 번이고 같은 트리 앞을 지나는 때도 많았다. 행복에 겨운 표정을 한 사람들이 둘, 셋씩 모여 커다란 트리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주현은 트리 앞의 사람들을 선명하게 봤지만, 그들의 눈엔 주현이 투명인간쯤으로 보였던 것 같았다. 제 몸을 뽐내는 트리와 사람들, 그 앞을 기름 냄새와 오래된 오토바이의 녹슬어 비릿한 냄새를 폭탄처럼 끌어안고 지나가는 주현. 그 경계가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 주현은 일부러 트리가 서 있는 곳에 시선을 두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주현은 이제 그 화려하고 어마어마한 것의 바로 아래에 서 있게 되었다. 3층 건물 높이의 화환에는 적게 잡아도 2천 개는 훌쩍 넘을 것 같은 꽃들이 무수히 꽂혀 있었다. 빽빽하게 꽂힌 꽃들 사이로 온갖 새와 곤충들이 날아들었다. 화환이 아니라 작은 숲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만 같았다. 영춘은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하더니, 사진을 한 장 찍어주겠다며 마당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영춘은 골목을 지나, 바닷가 모래사장 위에 오르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확성기를 대신해 양손을 입 가에 가져다 대고 소리를 모아 주현을 향해 외쳤다.


"자, 찍는다." 


주현이 어떤 자세로 사진을 찍히면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에, 영춘은 같은 구도에서 열 번은 넘게 셔터를 눌렀다. 빛 조각을 하나도 잡아내지 못한 두콩이, 좀 전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주현의 앞을 지나갔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해오시는 거예요?"

“어디서 구해오긴. 출장 가서 내가 직접 만들었지. 능만산 꼭대기 작업광장에서.”


영춘은 우렁차게 기합을 넣고, 허리를 뒤로 젖히며 스트레칭을 한 뒤 다방으로 들어섰다. 주현은 지난날 창고에서 찾아두었던 한 면을 칠판으로 쓸 수 있는 입간판을 꺼내 출입문 바깥쪽에 세워두었다. 분필을 집어 들고 또박또박 글씨를 써 내려갔다.


오늘의 메뉴 '최주현 스페셜'

최주현의 집념이 담긴, 대기업 커피보다 맛있고 특별한 밀크 커피!

오픈 기념 50퍼센트 할인!


본격적으로 만나다방 문을 열 준비를 하기 위해 주현은 주방으로 들어섰다. 대야를 꺼내 커피가루와 설탕, 프림을 비율에 맞게 넣고 곰솥에 끓여둔 물을 부었다. 영업용 국자로 호수 위에서 노를 젓듯 대야 위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연신 하품을 이어가던 영춘이 주방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주현은 미리 준비해 둔 도자기 잔에 국자로 크게 뜬 커피를 따랐다.


"커피 맛은 명희보다 딸이 훨씬 낫네."

"마을 사람들 메뉴도 새로 하나씩 만들어 보려고요."


손가락 하나만 겨우 들어가는 작은 손잡이가 달린 컵이었다. 갈 곳을 잃은 영춘의 새끼손가락이 나 홀로 뻗친 머리카락처럼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홀짝홀짝 주현이 건넨 커피를 마시며, 만족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시게요?"

"바뻐."


잔을 다 비우고, 잠시 테이블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영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장이 든 가방을 허리춤에 단단히 다시 메고 발걸음을 옮겼다. 망치, 펜치, 스패너 같은 연장이 영춘의 걸음마다 잘그락잘그락 몸을 부딪히며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영춘은 마치 연장들이 만드는 리듬에 맞춰 엉덩이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주현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마을 할매들 눈이 내 눈이고, 마을 할매들 귀가 내 귀여. 대충 한다는 소리 들리면 나한테 혼나잉?"


영춘은 그 말을 하면서, 연장 가방에 있는 망치를 만지작거렸다. 주현이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영춘은 탄성 좋은 두 다리를 교차하며, 마당의 거대 화환이 만든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길로 걸어갔다. 주현은 거대 화환이 만든 그늘 아래서 영춘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



“어서 오세요.”


문종 소리가 맑게 퍼지며, 만나다방의 공식 첫 손님 옥분이 들어왔다. 옥분은 주말 나들이를 가는 사람처럼 한껏 꾸민 채였다. 챙이 크고 커다란 꽃 장식이 달려 있는 모자와, 주름이 잘 잡힌 발목을 덮는 치마, 실용성보다는 멋을 중시한 각진 가죽 핸드백까지. 옥분은 사뿐 거리며 만나다방 안으로 들어와,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현은 아직 ‘최주현 스페셜’ 밖에 없는 메뉴판을 들고 옥분이 앉은 곳으로 다가갔다. 주현이 메뉴판을 내려놓기도 전에, 옥분은 귀를 간질이는 높고 선명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왔다.


“새로 오신 아줌마 사장님? 저는 호-옥뿐이에요. 장혹뿐!”


무조건적인 친절과 도시적 세련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다짐은, 옥분의 '아줌마' 한 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삼십 대 여자들 중 아줌마라 불리고 기분이 좋을 사람을 찾기 더 어렵겠지만, 그 단어는 다른 의미로 주현에게 발작 버튼이었다. 버튼이 눌리면, 억울함에 가까운 감정들이 주현을 잠식해버리곤 했다. 


옥분이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대고, 두 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턱을 받친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옥분은 마른 체형이었지만, 하늘하늘한 옷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팔과 다리에는 팽팽한 활시위 같은 잔근육이 뒤덮여 있었다. 특히 발목은 마라토너의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주현이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메뉴 설명을 하려는데 옥분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아. 줌. 마! 저는 블랙커피로 한 잔.”


주현은 이를 꽉 깨물었다. 터져 나오려는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예의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나다방 재오픈 첫날이어서 메뉴가 하나뿐이 거든요. 최주현 스페셜이라고.... 그게 제 이름인데, 그리고 저 아줌마도 아니고...."


주현이 옥분 앞으로 메뉴판을 내밀었다. 옥분은 토라진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배달 일을 하면서도 온갖 군상의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가게 운영을 하며 맞닥뜨리게 되는 사람들은 또 다른 결을 가진 듯했다. 적어도 배달 일을 할 때엔, 그 상황으로부터 멀어질 수나 있었지 가게 손님은 제 집인 양 버티고 앉아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첫날, 첫 손님부터 쉽지가 않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마음이 몰려오던 때, 주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미스터리 쇼퍼.


주현은 ‘미스터리 쇼퍼’라는 직업을 해외의 한 다큐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었다. 무명의 연극배우가 큰 체인점을 운영하는 기업의 미스터리 쇼퍼로 취직한 이야기였다. 서비스나 품질, 직원의 태도를 평가하기 위해 진상에 가까운 손님을 연기해야 했다. 미스터리 쇼퍼라는 것을 들키지 않으면서, 운영상의 허점을 자연스러운 연기로 잡아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주현은 옥분이 영춘이 보낸 '미스터리 쇼퍼'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옥분이 등장한 타이밍, 그녀의 과장된 몸짓과 어색한 태도는 이것 말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주현은 완벽한 연기를 겸한 서비스를 제공해, 영춘의 엉성한 테스트를 통과해 내겠다는 의욕이 샘솟았다. 대도시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서비스들을, 바다 마을에서 경험하게 해 주리라. 주현은 가슴을 내밀며 말린 어깨를 펴기 위해 잘 쓰지 않던 근육을 총동원했다. 날개뼈 사이의 근육이 뻐근하게 당겨왔다.


“손님, 만나다방은 현재 단일 메뉴로 운영 중입니다. 철저한 검증을 거친 메뉴만 선보이고 있...."

“저 가요, 블랙커피 없으면.”


옥분이 단단하게 턱 밑을 받치고 있던 팔을 빼냈다.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마치 70년대 한국 영화 주인공처럼 말했다. 주현이 메뉴 설명을 더 이으려는데, 옥분은 블랙커피를 마시지 못해 한이 서린 귀신이라도 된 것처럼 눈을 무섭게 치켜떴다가, 이내 눈물을 그렁거리기까지 했다. 이내 두 겨드랑이 사이에 두 손을 단단히 엇갈려 끼워 넣은 채 앉아 묵언시위를 시작했다. 블랙커피를 내놓기 전까진, 그의 고집을 아무도 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꽃 모자와 하늘하늘한 스커트에도 가려지지 않는 단단하고 각진 고집. 주현은 블랙커피가 별 것인가 싶었다. 커피 가루만 넣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그게 블랙커피 아닌가.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옥분이 팔짱을 풀고, 다시 꽃받침을 만들어 부드럽게 등을 구부렸다. 


“진-하게요.”

“네, 진하게 가져다 드릴게요."


주현이 옥분 앞에 내려놓았던 메뉴판을 집어 들자, 옥분은 눈을 반짝이고, 목소리를 한껏 낮춰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듯 소곤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제가요, 지금은 방학이라 고향에 내려와 있는 건데요."


옥분은 엿듣는 누군가를 의식하기라도 하는 듯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실은 서울 유학생이거든요. 내일이면 서울에 다시 돌아가요. 버스 타구.”


주현은 적당히 듣고 보아왔던 것들로 옥분의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말을 골랐다.


“대학생... 이시구나. 멋지네요. 아, 노인대학 뭐 그런 거죠? 서울 있을 때 오며 가며 본 적 있는 것 같아요.”


옥분은 기대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처음에는 작게 시작한 웃음이 점점 부피가 커졌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웃음의 크기가 커졌을 때엔, 옥분은 숨을 꺽꺽대며 눈물까지 흘렸다. 웃으면서 주먹으로 사정없이 테이블을 내리치느라, 나무로 된 테이블에서 쩍쩍 갈라지는 위태로운 소리가 났다.


“노인 대학은 노인이 가야지! 아줌마 덕분에 오랜만에 크게 웃었네요. 저 세화여대에 다녀요. 올해 신입생."


주현은 혼란스러웠다. 다큐멘터리에서 소개된 미스터리 쇼퍼의 역할은 고작해야 끝없이 환불을 요구하거나, 유통기한을 놓고 시비를 걸거나, 진열대 사이에 죽어 있는 벌레 등을 찾아내 구역질을 한다거나 하는 일들이 전부였다. 미스터리 쇼퍼 다큐멘터리에선 이런 역할극까지 하는 경우는 본 기억이 없었다. 서울의 명문대 중 하나인 세화여대에, 올해 신입생으로 들어간 70대 노인 손님에게 가장 적합한 서비스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주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주방에 들어간 주현은 높이가 낮고 입구가 넓은 커피잔 하나를 선반에서 꺼냈다. 커피 가루가 담긴 유리병을 잠시 바라보며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에 잠겼다가, 티스푼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숟가락 위로 봉긋하게 쌓인 커피가루를 조심스럽게 유리병 밖으로 빼내 커피잔에 떨어뜨렸다. 바글바글,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피포트를 들어 올리려다 말고, 옥분의 '진하게' 주문이 떠올랐다. 도대체 얼마나 진해야 진한 것일까. 주현은 김명희가 만든 옛 메뉴판을 집어 들고, 장옥분의 이름을 찾았다.


장옥분 스페셜: 커피가루 6스푼과 뜨거운 물 150ml. 도시의 밤 보다 더 진한 동산리식 에스프레소!


주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유리병에서 컵으로 커피가루를 다섯 번 더 옮겼다. 커피가루는 컵의 절반 높이에 이르렀다. 이게 과연 맞을까, 생각을 하면서도 주현은 뜨거운 물을 커피잔 위로 기울였다. 가루는 많고, 물은 적었다. 가루가 잘 녹도록 힘을 주어 티스푼을 저어보았지만, 쉽게 녹을 리 없었다. 단단하게 뭉쳐 덩어리가 되지 않으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오래되어 코팅이 군데군데 벗겨진 쟁반에 커피잔을 올리고, 첫 손님의 첫 주문을 완수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었다. 찻잔 위에서 검고 걸쭉한 파도가 넘실거렸다.


“주문하신 블랙 커피 드릴게요.”


주현은 옥분이 천천히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는 순간을 느린 화면을 보듯 지켜보았다. 새카맣게 찰랑거리던 커피의 표면이 옥분의 주름진 입술과 만나더니 이내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꿀꺽. 옥분의 커피 삼키는 소리가 조용한 다방 안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옥분은 찻잔을 내려놓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커피 농도만큼이나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입맛에 맞으신가요?”


옥분은 묵묵부답이었다. 천천히 눈을 떠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커피 맛이 최악이었구나. 주현은 시무룩진 상태로 옥분의 눈치를 살폈다. 최주현 스페셜이라도 얼른 내어 와서 만회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옥분의 눈치를 살피는데, 주현은 옥분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명희야.”


옥분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주현을 명희라 불렀다. 주현은 자신이 명희가 아닌 주현이라고 고쳐 이야기하려다가, 직감적으로 지금은 자신이 말할 차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인생을 위해 무언가를 선택했다면, 뒤 돌아보지 말고 그냥 가야 하는 거야. 내 인생을 봐라. 자꾸 뒤를 돌아보다가 이 꼴이 됐잖니.”


옥분의 말엔 주현이 감히 상상도 못 할 무수한 시간들이 응축되어 있는 것 같았다. 명희가 선택한 것, 그것을 선택하기 위해 살아온 인생, 뒤돌아 가버린 시간들과 옥분의 꼴까지. 


“모질지 못해서, 신장 한쪽을 떼어주고 와야 마음이 풀리면 그리 해야지."


주현은 마치 자신의 신장이라도 떼낸 것처럼 옆구리가 쿡쿡 쑤시는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이었을 것이다. 대학병원의 깨끗한 침상 위에 아버지가 누워있었던 기억이 있었다. 고모 내외가 찾아와 과일 바구니를 건넸던 장면들. 아버지의 애인이 배 하나를 깎아 접시 위에 올려두었던 그런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엄마를 보았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젠 절대 돌아보지 말고 가. 네 애도, 이미 떼다 버린 신장도 원래 없었던 것처럼. 영춘이나 다른 애들한테는 말 안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여름인데도 턱이 덜덜 떨리는 것 같은 맹렬한 추위가, 주현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자식도, 신장도 모두 없었던 것처럼 살았던 김명희는 매정한 사람이 되는 걸까. 혹은 그 반대인 것일까. 영춘이 알지 못하는 김명희의 얘기를 옥분에게서 들어야 했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머뭇거리는 사이, 문종 소리가 들리며 예닐곱 명의 할머니들이 만나다방으로 소란스럽게 들어왔다. 목에는 스포츠 타월을 걸고, 나이키나 아디다스, 르꼬끄 같은 개성 넘치는 브랜드의 러닝화를 각각 신고 있었다. 이마에는 아직 식지 않은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기능성 티셔츠는 땀에 절어 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지 않았더라면, 뒷모습만으론 도시에서 흔히 보는 젊은 사람들의 러닝크루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어깨를 반듯하게 편 이들이 주현을 향해 손을 뻗으며 주문을 했다.


“최 사장, 머릿수대로 최주현 스페셜 한 잔씩 줘. 하나 둘 셋… 총 일곱 잔. 참, 여기는 동산리 달리기 모임 회원들. 만나다방이 열려서 얼마나 좋아.”


여름의 열기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할머니들이 하하 호호 즐겁게 웃고 떠드는 사이, 주현은 복잡한 표정을 하고서 조리대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무리에 섞여 주현의 표정을 살피던 길자가 주방 쪽으로 슬며시 다가왔다.


“5년 전쯤이었나, 옥분이가 시간 여행을 하게 된 게."

“시간 여행요?”


길자가 뒤를 돌아보며 눈치를 살피고, 목소리를 더 낮췄다.


“치매. 요즘 들어선 옥분이 시간이 더 뒤죽박죽이야. 사실이 아니었던 것들도 섞이고.

“김명희 씨, 그러니까 제 친모가 아버지한테 신장을….”

“다 옥분이 본인 얘기야. 명희 얘기가 아니고.”


옥분이 짐을 챙겨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다가왔다. 길자가 옥분을 향해 알은체를 했다. 옥분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줌마, 커피 잘 마셨어요. 저 가요.”


옥분이 핸드백을 열어 안을 뒤적이더니, 이내 파랗게 익은 다래 세 알을 꺼내 커피값이라고 건넸다. 길자 주현을 향해 눈을 찡긋거려 보였다. 주현도 눈치껏 다래를 집어 들고, 돈통 안에 넣는 시늉을 했다. 옥분은 핸드백을 챙겨 들고 치마를 살랑살랑 흔들며 출입문을 빠져나갔다.


“옥분이가 마시는 건 외상으로 달아놔. 내가 커피값 한 번씩 챙겨줄 테니까.”


주련은 일곱 개의 찻잔을 테이블 위에 두 줄로 나란히 놓고, 미리 만들어 보온병에 넣어두었던 최주현 스페셜을 천천히 따라냈다. 마지막 잔을 채우자, 탄성 좋은 스프링이라도 달린 것 같은 다리로 할머니들이 하나씩 주방 가까이로 와 제 몫의 커피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갔다.


“요즘 도시에서는 죄다 ‘셀프’인 것도 모자라, 무인으로 운영한다는데. 우리도 셀-프 써어-비스 해줘야 도리지. 만나다방 최 사장 덜 고생하게.”

“그럼 오늘 건배사는 ‘셀프서비스’로 하자고.”

“셀-프 써어-비스!”


한 명이 선창을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따라서 ‘셀프서비스’하고 외쳤다. 뒤이어 와하하, 웃는 소리가 다방을 가득 채웠다. 주현은 옥분을 생각했다.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옥분의 기억은 얼마나 많은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이 뒤섞여 있는 것일까. 주현은 명희에 대해 얼마나 알게 된 것일까.


늦은 오후가 되자, 마을 사람들의 전부가 만나다방에 들렀다 간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왔다. 체육대회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사람들도 언뜻언뜻 보였다. 대부분이 영춘과 비슷하거나 더 나이가 많은 할머니들이었다. 모두가 마당에 설치된 화환을 보고 만나다방의 오픈 소식을 알았다고 말했다. 손님들은 자리를 채우고 앉아 있다가, 다른 손님이 와서 자리를 찾느라 서성이면 그 때야 일어나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 덕분에 오후 내내 빈자리를 보는 일이 드물었다.


마당에 놓인 화환이 만들어낸 크고 긴 그림자가 시계 시침처럼 마을을 크게 돌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손님도 내일 또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 개수대에는 설거지하지 못한 컵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선 자리에서 바로 일을 해치울까 하다가, 주현은 잠시 앉아 쉬기로 했다. 다방 가운데 자리, 주현이 처음 이곳에 와 잠에서 깨었던 테이블로 향했다. 주현은 등을 구부려, 테이블 위에 머리를 그대로 가져다 댔다. 창 너머로 어둑해지는 바다를 보았다.






”장옥분 스페셜: 시간 여행 블랙커피”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장옥분의 놀랍고도 깊은 내면을 담은 음료. 밤하늘을 닮은 진한 빛깔의 색과 끝을 알 수 없는 쓴 맛이 특징.

커피 6스푼, 뜨거운 물 150ml, 다진 호두 1조각

뇌 건강에 좋은 호두를 잘게 다진다. 커피 6스푼에 뜨거운 물을 붓고, 다진 호두를 넣는다. 호두의 고소한 풍미가 커피의 쓴맛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잘 저어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