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가지 '도시적' 콘셉트
이 책은 건축가 김진애가 말하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 3부작 중 첫 번째다. 1970년 생인 나는 서울의 중심에서 살다 위성도시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서울 주변으로 밀려났던 세대다. 당시 내가 살던 터전은 밀리고 개발이 되면서 도시 기능이 확대되었다. 그래서 내게 도시란 기존 것, 낡고 후진 것들을 밀고 덮어 새로움을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된다.
본 내용에 앞서 <도시 3부작을 펴내며>에서 '도시가 더 대중적 관심 주제가 되길 바란다'라며 이어가는 문장에서 예전 달동네 속 군상들의 삶을 그려낸 '서울의 달'이란 드라마가 떠오를 만큼 도시 이야기는 과거와 현대를 버텨낸 나로서는 공감하기에 충분하다.
'사람이 들어오면 이야기가 된다.'라는 이야기. 그렇다. 어쩌면 끝나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우주가 함께 온다고 했을까. 그런 12가지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기대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도시를 '익명성'으로 정의하는 저자의 견해에 어릴 적 대문에 붙어 있던 문패가 생각났다. 너 나 할 것 없이 빈곤하게 시작해서 자기 집을 갖는 순간을 명확하게 확인시켜주는 방법은 대문에 자신의 이름을 대문에 거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때는 익명성이랄 게 없었을까? 요즘처럼 이름이 아닌 숫자로 정의하다 보니 익명성은 자연스럽게 도시적 속성이 된 게 아닐까 싶다. 거기에 다채로운 드라마를 만드는 길까지 더해 여하튼 타인과 섞여 살아가는 참 애로가 많은 공간이라는 점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도시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달라진다." p 58
청와대부터 국회 그리고 검찰과 경찰'청'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검찰청을 두고 '무표정'하다는 표현이 어찌 그리 그로테스크하게 들리는지 시간이 흐른 뒤에는 로맨틱하게 들리는 건물이 되어 좀 더 시민과 가까워졌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한데 저자는 몰랐을까? 국회 의사당 뚜껑이 열리면 솟아오르는 건 마징가 제트가 아니라 태권 브이다.
건축가의 건축물에 얽힌 이야기보다 역사가의 건축물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의 역사 이야기는 넓고 깊어 놀랍다. 놀랍기만 한 게 아니라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여하튼 매력적이다.
근데 아는가? 우리의 궁은 장애인, 특히나 보행이 불편한 장애인에게는 아주 힘겨운 곳이라는걸.
여기저기 높고 낮은 계단이 허다하고 심지어 바닥은 바위를 박아 놓아 휠체어로 반나절만 궁을 돌아다녔다간 허리 나갈 판이다. 사실 불평등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문화재청에 문의했더니 말 그대로 문화재라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한다. 정말 대책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이질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구조물을 만들지 않으려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한 결에서 본다면 궁의 구조가 왜 그 모양인지 알기 위해선 콘텍스트를 이해하면 될까? 건물과 공간의 맥락 읽기도 중요하겠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과 사람 혹은 그 사람이 담긴 공간의 맥락 읽기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어쨌든 난 오늘부터 저자가 말한 콘텍스트를 열심히 해볼 요량이다.
바벨탑 공화국이라니, 참 명쾌한 정의다. 그동안 땅덩어리 좁은 나라에서 적잖은 인구가 그것도 좁은 도시에 몰려 살다 보니 아파트를 비롯한 건물들은 하늘 높은 줄 몰고 솟구치기만 한다는 이야기가 꽤나 설득력 있는 이야기라 여겼다. 그런데 이런 조화 속에는 몹쓸 'ㅂ자 돌림병'이 있었을 줄이야. 저자의 새로운 공간 해석이 실현되기 바란다.
"달동네는 설계해서는 만들 수 없는 공간이다. 건축가 없는 건축, 도시계획가 없는 도시의 정석이다. 필요한 대로 생기고 필요한 대로 변한다. 그러면서도 도시를 이루는 기본적인 룰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개별적인 변화와 다양성과 즉흥성과 의외성이 흥미진진하다. 그렇게 50년, 60년, 70년을 살아내는 생명력을 유지한다. 과연 우리가 만든 신도시들은 이럴 수 있을까?" p304
나는 어린 시절 달동네에서 살았다. 성동구 옥수동의 산꼭대기 5번지.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도 그 꼭대기에서 입학했다. 한데 기억 총량이 많이 부족한지 그다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게 별로 없지만 그중 겨울이면 언덕배기에 연탄재를 뿌려 놓아야만 다닐 수 있었고 언덕으로 따라 만들어진 빙판에서 썰매를 탔으며 그 높디높은 언덕을 오르내리며 엄마는 양동이 지게를 어깨에 메고 언덕을 내려가 물을 한강 물을 길어 오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생경한 직업일 테지만 그런 수고로움을 대신하던 물 장수가 달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지금이야 부촌일수록 위로 올라가서 터를 잡고 근사한 야경을 내려다보며 분위기도 내지만 그때는 해가 떨어져 깜깜한 암흑일 뿐이어서 한강은 보일 턱이 없는 곳은 배고픈 자들의 공간이었다.
건물과 사람 그리고 공간과 역사, 인간이 정착을 시작하면서 만들기 시작한 공간과 건축에 대한 모든 게 건축이란 한 분야에 매몰되는 게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인문학적 이야기가 넘치는 이 책은 읽을수록 흥미진진 해진다. 다른 시리즈도 읽어보고 싶다.
단팥빵을 샀더니 앙꼬가 잔뜩 들었다는 사실에 확 행복이 퍼지는 것처럼 '초판 한정 특별부록'이란 소책자가 덤으로 왔다. 그래서 도시 여행이 더 즐거워졌다. <도시는 여행 인생은 여행>을 보면 그가 말하는 여행에 대한 생각들 혹은 팁을 들을 수 있다.
그중 '우연한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어차피 세상에 나온 것도 내 의지와 상관없는 우연이었는데 인생 자체도 그런 우연의 연속이고 그 속에서 딱히 새롭다 느끼며 우연처럼 만나고 헤어지고 머물고 떠나는 삶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