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기 암환자의 슬기로운 치병 생활
윤* 아.
결혼 25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해.
25년 전 오늘 9월 30일 토요일 14시, 마포의 어느 예식장.
거기에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사랑스러워 자꾸 만지고 싶었던 신부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윤*이 너였잖아.
평소 화장을 하지 않아도 빛나던 너였는데,
그날은 변장에 가까운 화장을 하니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너무 눈부셨어.
화장이 어색했던지 살포시 수줍게 웃던 모습은 지금도 너무 선명해 잊히지가 않아.
넌 그때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웠었지.
25년이라는 긴 세월 너무 고마웠구. 난 너무 행복했어. 그리고 너무 미안했구.
이 글을 쓸까 정말 정말 고민 많이 했어.
글을 쓰는 '나'나 읽는 '너'나 눈물바다가 될 게 뻔해서. 요즘 우린 살짝 건들기만 해도 눈물 수도꼭지가 터지잖아.
그렇지만 큰 선물은 못해도 내 마음을 담은 선물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25년 우리 삶의 희로애락과 윤*이 너에 대한 고마움을 눈물로 쓰고 싶었어.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지워도 지워도 지울 수 없는 백지로 된 편지'를 쓸까도 고민했지만 내 마음 하나하나 진심을 담아 표현하고 싶었어. 백지 편지였더라도 너는 내 마음을 모두 헤아리고도 남을 테지만...
우리 신혼 초에 참 많이 싸웠지. 왜 아니겠어. 30여 년을 서로 다르게 살다 함께 살게 되니 다툼이 있는 건 당연하고 다툼이 어찌 보면 꼭 나쁜 것만을 아니라고 생각해.
난 그 신혼 초 다툼들을 통해서 사실 많이 변했어.
너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주장과 설득이 없었다면 난 나쁜 남편 나쁜 아빠가 됐을지도 몰라.
"왜 명절 때 시댁을 꼭 먼저 가야 돼?
시댁은 전날 가서 자고, 친정은 왜 당일만 가?"
지금껏 남들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듣고 보니 정말 왜 그런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지만 싸움이니 만큼 우길 건 우기고 봐야 했어.
"아니 수백 년 전통인 걸 나보고 어쩌라고. 그걸 어찌 설득하냐고. 좀 그러려니 하고 따라주면 안 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설득력이 없었지.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이라고 넘겼지만 시간이 갈수록 너의 말에 나도 모르게 길들여져 가고 있었던 거야.
'내가 결혼을 잘못한 거야? 뭐가 이리 드세지?'
바보처럼 이런 생각조차 했다.
점수를 만회해 볼 요량으로
"집안일 많이 도와줄게" 하다가 해머로 머리를 세게 맞았었다.
"왜 집안일을 도와준다고 해?
같이 밖에서 일하는데 도와주는 게 아니라 자기 몫인 거지."
또 한방을 먹고 완전 KO.
근데, 그게 틀린 말이 아니란 걸 점점 깨달았어.
윤*이 너는 얄밉게도 개화기 시대 신여성처럼 그런 문제점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었지.
세상에 당연하다고 느끼던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불합리한 것들이란 걸 느끼기 시작하고 그런 점들을 고쳐나가기 시작했던 게 아마 그때 즈음이었을 거야.
나를 변화시켰지. 겉으로는 내가 옳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조금씩 너의 말을 받아들이고 조금씩 고쳐나가고 있었어. 오늘의 다정다감, 성평등주의자 만자씨는 그렇게 탄생했던 거야.
그래도 아이들과 진짜 많이 놀아줬잖아. 그건 자기도 인정하지 그치?
우리에게 보석 같은 두 녀석이 찾아왔지.
그때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었어.
근데, 감동은 감동이고 그때부터 워킹맘 윤*이 너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지.
아이들이 들으면 서운해하려나?
처형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아마 넌 휴직을 해야 했을 거야.
대한민국 조직생활을 하는 나는 '워라밸'을 신조로 직장 생활을 했지만 육아를 담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어. 그래도 다른 남자들에 비해 많이 기여했다고 봐. 그치?
아이 둘을 반드시 자연분만으로 낳겠다고 고집하고 그 흔한 무통주사조차 맞지 않았던 너.
직장 생활하면서도 1년, 1년 6개월을 모유 수유하던 너.
직장에서 유축기로 젖을 짜서 냉장 보관하고 직장 출근할 때 아이들이 먹도록 하던 너.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야. 그래도 난 옆에서 지켜봤잖아 그게 웬만큼 독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넌 육아와 일터를 병행했지. 아주 건강하게 아이들을 잘 키워줬고. 난 그게 지금 생각해도 너무너무 고마워. 미안하기도 하고.
왜 하필 너에게 그런 아픔이 찾아왔을까?
우리 둘째 만군이 임신했을 때 어머님 여의었던 일.
어린 첫째 때꿍이 재롱도 보여드리고 둘째 만군이 임신하고 음식 투정도 하는 등 장모님께 한참 어리광을 부릴 시기에 넌 그렇게 장모님을 보내드려야만 했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이별의 아픔.
지금도 가끔씩 힘들 때 너의 표정을 보면 어머님을 생각하고 있는 게 보여. 그럴 때 마다 내 가슴도 쿵 내려앉곤 해. 너무 가슴이 아프지.
그런 너를 두고 나까지 먼저 갈 수는 없잖아.
죽어도 내가 죽지 않아야 하는, 죽지 못하는 이유야.
너에게 두 번의 고통을 줄 수는 없잖아.
자 이제 좀 눈물 좀 훔치자.
호흡 한번 크게 하고.
정말 하고 싶지 않은 가정인데,
유니텔 통신에서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넌 더 행복했을까?
그 수많은 접속자들 중 둘이 인연이 되어 만나고 결혼까지 하게 되고.
정말 드라마틱한 한편의 영화였지.
근데, 근데 말이야.
그때 윤* 이 너가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 피 말리는 치병 과정을 겪지 않았을 테고..
그럼 더 행복했을까?
요즘엔 그런 생각까지 들어. 바보 같지?
아닐 거라고 생각해. 아니고 말고. 지금 우리 조금 힘들지만 행복하잖아. 그치?
또 눈물이 나려고 하네.
나에게 선택이 주어졌지.
미국으로 파견을 갈 것인지 말 것인지.
미국으로 2년 파견근무를 가면 지긋지긋한 조직생활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고, 동반 휴직이 가능해 너에게도 휴식의 기회를 줄 수 있었지.
근데 그 좋은 기회를 남들은 다들 싫다고 했어. 왜냐구?
미국 파견을 가면 그만큼 승진이 늦어지기 때문이지.
동기보다 한발이라고 더 앞서가려는 욕심들이 다들 있었던 거지. 사실 그게 당연한 선택인지도 몰라.
그런데 난 뭐야? 워라밸을 신조로 조직생활 해왔잖아. 일도 중요하지만 가정도 중요했어.
너에게 나에게 쉼이 필요했고 아이들에게도 새로운 환경(학원이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해주고 싶었어. 그럼 쉬러 가면 되잖아. 선택은 분명했지.
별 망설임 없이 미국 생활을 선택했지. 돌아와서 열심히 하면 승진도 별 어려움이 없을 거란 근자감도 있었고. 나중에 그게 큰 오산임을 알게 됐지만.
선택의 결과는 너무너무 좋았어.
우리 가족의 화양연화였지.
나는 짧은 영어로 미국 대학원 생활에 고생을 했지만 조금 쪽팔리면 뭐 견딜만했어.
너는 어땠어? 2년간 아무 일 하지 않고 오로지 아이들만 케어하면 됐잖아. 너는 지금도 그때가 너무 좋았다고 얘기해.
아이들? 비록 어리지만 늘 엄마 아빠와 하루 종일 함께 노는 게 일이니 얼마나 좋았겠어.
그런데 뭘 망설여. 당연히 가야 했던 거지.
비록 그 선택으로 승진이 늦어지고 그 이후 조직 생활이 꼬이기 시작해서 스트레스도 제법 받았고, 혹 그게 병의 시작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아.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난 주저 없이 선택을 할 것이었고, 승진을 해서 다른 직급이 되어 또 두 번째 기회가 왔을 때도 망설임 없이 파견을 선택했지.
두 번째 파견 때는 아이들도 커서 귀국 후 아이들 대학 입시를 걱정하는 분들이 많았어.
우리 부부도 그걸 걱정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거긴 학원이 없는 천국이긴 한데 아이들이 귀국해서 전쟁 같은 입시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걱정이었지.
놀 때는 좋지만 그 대가는 혹독할 수 있을 테고, 사실 귀국해서 아이들이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잘 이겨내줬어.
기특하고 고마운 일이지.
그게 가장 고민거리였지만 역시 선택은 미국 파견이었지.
우린 처음 미국 생활 보다 미국 생활에 더 익숙해 있었고, 그때 보다 더 알차게 하루하루를 보냈잖아. 아이들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 기회가 있었고.
그중에서 가장 기억 남는 건 방학 때 미국 동남부에서 서부까지 40일간의 대륙횡단 여행을 했던 거야.
작은 차로 캠핑까지 하면서 40일간의 여행을 한다는 건 미친 짓이었던 것 같아. 내비게이션도 잘 안되던 시절이고, 영어도 아주 능숙한 사람이 없는데도 그 여정을 무사히 잘 마쳤지.
너무너무 기억에 남는 여행이 아니었나 싶어.
요즘 아이들이 농담 삼아 말하잖아.
"어떻게 우리 아빠가 저런 계획을 다 짜셨데. 영어도 잘 못하시는 분이. 대단해요."
놀리는 건지 칭찬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뭔가 대단한 일을 했다는 것 같기는 해서 기분은 좋아.
그 40일간의 미국 횡단을 하면서 겪었던 어려움과 극복 과정은 우리 가족이 지금 잘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 아닐까 싶어. 그치?
자기랑 나랑은 양가 도움 없이 신혼생활을 했잖아.
전세도 겨우 대출받아 마련했었고.
작은 평수에 낡은 아파트였지만 그래도 조금 무리해서 예쁘게 꾸미고 입주하니 얼마나 행복하던지.
우리의 첫 보금자리는 그렇게 작고 형편없었지만 마음만은 더없이 행복했었지.
근데, 그 행복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지. 아이들이 커가고 짐이 늘고 우리도 나이를 먹으면서 남들 다 사는 집은 언제 사야 할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잖아.
재테크는 남의 일이라 청약은 집 살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알았고, 당첨되면 떴다방에 팔면 된다는 걸 아주 나중에 알았을 정도니 참 바보스러웠지?
미국을 두 번이나 살다 왔으니 이래저래 돈 모으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뭘 낭비하며 산 것도 아닌데..
나이가 들수록 집을 사야 한다는 조바심이 생겼었지.
그러다 마침내 떨치고 일어났잖아.
"집을 사러 가자."
발품을 많이 팔았지. 그 더운 날 이집 저집을 수없이 다녔잖아. 근데, 이상하게 전혀 힘들지 않았어. 우리 집을 살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떠서.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잖아.
그러다 눈에 쏙 들어오는 집을 발견하곤 바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지.
우리 딸이 보배인지 그날 마침 같이 집 보러 갔는데 그 집을 선택하게 된 거야. 신기했지.
결과는 소가 뒷걸음 치다가 쥐잡는 격으로 탁월한 선택이 되었지.
무얼 잘해서가 아니고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집을 산 이후 집값이 많이 올랐어. 아마 그때 집을 사지 않았다면 영원히 무주택자 신세로 살지 않았을까 싶어.
영끌로 대출을 많이 받고, 낡은 아파트라 몸 테크로 불편하지만 넌 이 집을 너무 좋아했지.
왜 아니겠어. 낡았지만 첫 우리 집인걸.
리모델링 하는 동안 밤마다 몰래 와서 진행 상황을 살펴보곤 했는데 그땐 정말 세상이 다 우리 것이었지.
조금씩 변해가는 집을 보면서 입주할 날을 얼마나 고대했던지.
그렇게 행복한 순간들을 즐기고 있을 때 우리에게 시련이 찾아왔지.
2020년 8월.
내가 암에 걸렸던 거야. 우린 늘 치매를 걱정했잖아.
"운동 열심히 해서 치매 걸리지 말자. 그거 너무 슬픈 일이야."
산책을 할 때면 서로에게 하던 말이었잖아.
근데, 암이라고?
신이 질투를 한 거지. 안 그래?
발병과 치병 과정은 이미 많이 얘기해서 그만 접기로 하자.
그런데 이 얘기는 하지 않을 수가 없네.
첫 수술 후 내가 중환자실로 옮겨졌을 때 그 아무도 없는 컴컴한 중환자실 앞에서 삼일 밤낮을 혼자 울며 고통에 몸부림쳤을 너를 생각하면 난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악몽을 꾸기도 해.
윤*이 너의 별명이 '수호천사' 잖아.
괜히 수호천사가 아니야.
그 힘든 과정 속에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고 공부하고 정보를 얻어내느라 정신이 없었지.
그런 너의 관심과 나를 살려야겠다는 의지가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이유인 게지.
고맙다고 하기엔 너무 표현이 약하다.
결혼 25주년 명품백은?
늘 다음 해는 사준다고 미뤄왔던 명품백을 25주년에는 꼭 사주고 싶었는데 올해도 역시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되었네.
"사줄게. 어떤 거 사줄까?"
내가 영혼 없이 얘기하니 너도 받고 싶겠니?
"다음에 사줘."
또 그렇게 명품백 선물은 또 해를 넘기게 되었지. 그리고 내년엔 과연 가능할까?
에휴~~~
내가 지어준 너의 별명.
'홈쇼핑 중독자', '반품의 여왕'
윤*이 너가 아무 생각 없이 시간 보낼 수 있는 게 골프와 홈쇼핑 시청 하기잖아.
홈쇼핑 중독자라고 할 만큼 늘 채널이 홈쇼핑에 돌려져 있고 주문도 많이 해서 집 앞에 늘 배달이 쌓이곤 하지.
그런데 그중에 8~90%는 반송이잖아.
애초에 마음에 쏙 들지 않았던 걸 싼 맛에 주문을 하니 마음에 들 리가 없지.
어느 날 늦게 귀가를 했을 때 소파에 누워 자고 있던 너를 보았어.
한 손엔 리모컨이 쥐어져 있고 티브이에선 세일 홈쇼핑 방송이 나오고 있었지.
세 개에 10만 원도 안 되는 청바지 광고.
그때 난 눈물이 터져 버렸지.
잠자는 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던 거야.
언제 우리 윤*이는 백화점에서 맘에 드는 옷을 골라 입을 수 있을까?
내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가끔 그 정도 호사는 누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너가 명품백 선물을 받을까?
윤*아!!!
지금도 넌 25년 전 그 신부보다 훨씬 더 예쁘고 사랑스러워.
그리고 비록 내가 많이 아프지만 우린 그런 순간들조차 감사하며 행복을 찾아 잘 살고 있잖아.
윤*아!!
해준 게 없지만, 종양표지자 800 이란 엄청난 충격만 선물했지만,
그래도 25주년 결혼기념일을 진심 축하해.
난 너가 있어 25년이 너무 행복했어.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은혼식'이 되어 버렸지만,
내년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결혼기념일'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어.
그때까지 또 참아주고 다독여 주고 예쁜 표정 지어줄 거지?
사랑해. 너무너무 많이 미안하구.♡♡♡
"그늘진 너의 얼굴을 볼 때면 장모님이 생각나. 살아계셨다면 너에게 많은 힘이 되셨을 텐데...."
- 남편 생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