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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문선 Dec 31. 2023

나는 할아버지다

어느 철도 전문가의 은퇴 이야기

               "할어버지가 되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 알었다면 나는 먼저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 셰리풀리의 "손주와 함께 하기" 글 중 인용 -


"할아버지" 누군가 등뒤에서 날 부르면 화를 버럭 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 염색을 하고 캐주얼한 코디로 위장한다 해도 나는 할아버지임에 틀림없다. 첫째 손녀는 코로나 팬더믹 세대다. 거대한 제국 미국도 코로나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던 2020년 4월 미국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태명도 "뽈티"였다.


출산 예정일을 2주 정도 앞둔 시점이다. 아내는 딸아이 산후조리를 위해, 전쟁터에 출정하는 비장함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한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은 코로나 감염으로 사망자가 급증하고, 전 세계적으로 입출국 절차나 방역이 강화되는 시기였다. 산모에 좋은 기장 미역을 한 가방 챙겨 도착한 미국에서도, 자발적 격리에 들어간다. 조그마한 방에서 2주간 격리한다는 것은 친정엄마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산모에게 인색한 미국이다. 딸아이는 대학 조교수 임용 첫해라 충분한 출산이나 육아 휴직도 없이 힘든 학사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사위도 자동차로 5시간 거리의 대학 연구소에서 [포닥] 중이라 손녀를 돌볼 수가 없다. 친정 엄마표 산후조리와 3개월 노력봉사도 유효기간이 만료된다. 손녀의 운명은 자연스럽게 할아버지 할머니 나라로 결정이 되었다.

   [포닥 Post doctor] 박사학위 후 대학 또는 부설 연구소의 소속 연구원


환영합니다. 한국에 오신 것을

초보 엄마아빠의 성대한 백일상을 받고, 첫 손녀는 아빠의 유모차에 실려 코로나로 썰렁한 인천공항에 당도한다. 평소 같으면 친가 외가 모두 나가 성대한 입국 환영식으로 맞이하겠지만, 방역 수칙에 따라 얼굴 한번 보기 어렵다. 나 역시 해외 출장이 계획되어 있어, 사돈댁을 방문 먼발치로 한 눈인사가 고작이다. 친가 쪽은 손녀가 외할아버지를 닮았다 하고, 외가에서는 친할아버지를 닮았다 한다. 판단하기도 어렵고, 참 공평한 녀석이다.


친가와 외가를 오가며 손녀는 그렇게 자라 지금은 만 3살이다. 두 집안의 슈퍼스타 손녀는 엄마가 부산 D 대학으로 근무처를 옮겨, 지금은 대학교 부속 어린이집 원생이다. 크고 빨강 어린이집 가방이 체구에 비해 비대칭이지만, 시현이, 세준이, 준서 절친도 있다. 친구 만나러 가는 의젓한 어린이집 원생이다.


엄마가 해외 세미나를 가거나 학교 행사가 있을 땐, 외할머니인 아내가 소방수로 출동한다. 그래서 외할머니 만 찾는다. 서울에 보내지는 경우도 있다. 서울 친가엔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고모가 있다. 고모는 예쁘기도 하거니와 의사 선생님이다. "예쁜 고모"라 칭하는 것을 보면 차별화된 선물 공세에 넘어간 것 같다.

외할아버지_drawing by Yoonwoo


집사람이 운동이라도 가는 시간엔 나에게는 큰 시련이 닦친다. 외할머니에게만 프랜드리 한 그 녀석의 울음소리소리가 온 아파트 골목을 깨우곤 한다. 아~ 내가 무얼 잘못한 걸까? 할아버지로써 부족한 점이 무엇일까? 그래도 이 녀석이 만족해하는 놀이가 있다. 할아버지 특기인 기차놀이다. 담요를 기차인양 앞에서 끌고 이방 저 방 왕복하는 것이다. 부산에서 울, 서울에서 부산 차비는 균일가 5천 원이다. 무슨 연유인지 이 녀석은 차비를 내라 하면 5천 원이라고 말하고 주머니에서 보이지도 않는 5천 원을 꺼내 내민다. 그것 말고도 돈 달라고 하면 무조건 5천 원이다. 받아놓은 손녀표 어음 현금화 하면 족히 100만 원은 될 성싶다.


나의 할아버지


물론 나에게도 할아버지와 의 추억이 있다. 할아버지는 장손인 나를 특별한 애정으로 대하셨다. 고향집은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들인 우리 가족, 두 분의 작은 아버지 가족 그리고 미혼인 막내고모 가히 20명은 족히 되는 대 가족이었다. 할아버지와 겸상을 하는 가족은 장손자인 나 하나다. 할아버지 밥상과 다른 가족의 밥상은, 오성급 호텔 뷔페식과 구내식당의 차이다. 할아버지의 밥상머리 교육은 해병대 수준이다. 할아버지는 이미 하버드대 캐서린 스노우 교수 연구팀이 2년 동안 관찰을 통해 "책을 통해 배우는 단어는 300개, 밥상머리 대화를 통해 배우는 단어는 1000개"라는 연구결과에 앞선 지혜가 있었나 보다.


- 어른이 먼저 드신다.

- 술가락과 젓가락은 함께 들지 않는다.

- 음식을 소리 없이 먹는다

- 식사 중엔 엔 대화를 하지 않는다

- 반듯이 무릎을 꿇는다.


덤으로 따라오는 알밤이 무섭기는 하지만, 흰쌀밥과 고기반찬의 매력이라면 기꺼이 이마를 내밀수 있었다. 집안의 내력인지 나에게는 조금은 특별한 손금을 갖고 있다. 이것이 마치 하늘이 점지한 특별한 징표 인양 할아버지의 자랑거리였다. 근엄한 표정으로 "이런 [막 쥔 손금]은 검판사 운명이 당게".  

   [막 쥔 손금] 손금에서 감정선과 지능선 맞붙어 한 줄로 뻗은 손금


지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내년 1월에는 두 번 채 손녀가 태어난다. 이분의 태명은 "레드불"이다. 포뮬러원 레드불팀 찐 팬인 엄마 아빠가 만든 태명이다. 출산이 가까워지자 나 역시 조금은 들뜬기분이다. 첫 번 채 미션은 작명이다. 고향에 계시는 숙부님께도 손녀의 탄생을 알리고, 족보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성씨 내력이나 항렬을 재차 확인하기 위함이다. 작명소를 찾을까 하다 아들 부부의 의견도 있고 직접 하기로 한다. 도서관에 비치된 많은 서적을 뒤적거리기는 하나 큰 도움은 안 되는 것 같다.


며느리가 초등학교 교사라 많은 제자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또 나름 딸아이게 주고 싶은 이름이 있다. 부르기도 쉽고 좋은 의미라, 엄마 아빠 친가 외가 만장일치로 결정한다.  자! 이제 우리 "레드불" 지구에 안전하게 착륙하기만을 기다린다.


작명 관련 도서_photo by amunzen


어떤 할아버지로 기억될까

인간수명의 증가로 나는 좀 더 긴 시간을 두 손녀와 함께 할 것이다. 동화책 몇 페이지를 읽어주는 것도 목이 아프다. 에너지 넘치는 손녀의 기분을 맞추어 주는 것도 현기증이 난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심심해"를 슬픈 표정으로 말하는 손녀에게 나는 좋은 할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자란 고향, 엄마 아빠의 어린 시절을 끄집어내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은퇴 후 나의 일상이 된 글쓰기, 클래식기타, 사진, 여행 이런 나만의 보금자리로 초대해야겠다. 그 보금자리는 두 손녀에게 인생은 참 재미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할아버지로부터 내가 받았던 알밤 사랑처럼, 두 손녀가 예의 바르고 슬기로운 기운으로 세상을 대하도록 정성을 다하여야겠다. 나는 또 조그만 재능이라도 찾는 날이면, 두 손녀는 특별한 운명을 갖고 태어났으며 검판사는 당연한 것이라고 격려할 것이다.  Time to take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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