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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문선 Feb 11. 2024

지금이 너무 좋다

어느 철도 전문가의 은퇴 이야기

"젊은이는 늙고, 늙으면 죽는다."

-이어령-

                                                   

오물을 온몸에 뒤집어쓴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갑자기 강풍노도의 물줄기가 나를 덮쳐 온다. 온몸을 덮었던 오물이 허물을 벗듯 사라진다. 휴~ 살았다. 멀리 떨이진 곳에서는 아내와 두 아이가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꿈이다. 10여 시간의 위암 절제 수술 후 회복과정에 꾸었던 잊을 수 없는 꿈이다. 수술 전 마취제가 투여되는 순간 나는 이 세상과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편안함이 죽음을 대하는 시간이었다.


암수술 후 5년 이내 재발생하지 않으면 완치 판정을 한다고 한다. 완치 판정 까지도, 남은 반의 위조각이 녹아 없어지는 긴장의 순간들이었다. 1개월 단위, 3개월 단위, 6개월 단위로 정밀 검사 후, [권교수]와 면담의 시간을 갖는다. 숨을 쉴 수 없는 30초의 침묵 후, "재검사 필요합니다." 또 한바탕 병원을 들락 거린다.  "검사결과 좋습니다." 저 높은 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듯 감사의 눈물이 나올 듯하다. 더구나 암 전이나 새로운 암 가능성 소견을 듣고 재검사를 할 때는 생에 끝자락이라는 절망감으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권교수] H 대학병원 재임 시 위암 명의로 알려졌으며, 정년 퇴임 후 강원도 산골 보건의로 근무함.

photo by pixabay


나에게 삶이 하루만 주어진다면 ,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좀 더 길게 일 년이라면 , 좀 더 길게 10년이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구를 떠나야 하는 작별의 순간, 나는 어떤 모습일까? 지하엔 장례식장이 위치한 병원 건물을 나와, 집에 이르는 강변북로는 그런 한 질문과 남아 있을 미래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었다.  


요즘은 대부분 병원에서 사망한다고 한다. 인간의 수명을 다해 죽는 사람은 없으며, 사망 당선증쯤 되는 암이거나 또는 어떤 질병이 사망의 원인이 된다. 우리는 평균수명을 다해도, 죽음은 나와는 친하지 않은 불사조로 씩씩히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우리는 죽음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질병과 싸우다 죽게 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질병 또는 치매로 요양병원에 몇 년씩 입원해 육체적 생명만 연장하다가 죽거나, 여러 이유로 죽을 수도 없는 상태로 몇 년을 버텨야 한다.


지난여름, 나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아직도 내 주머니의 욕망을 지키기 위해 나를 합리화하고, 화를 내고, 남 탓을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한국인 남성 기대 수명과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나이가 75세라면 10년의 시간이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의 전부이다. 뚜렷한 노후 자금이나 수입을 생각하면 아내는 좀 더 내가 경제 활동을 하기를 기대할 수도 있다. 아직도 한창 일할 때라고 덕담을 하는 동료도 있다. 그래도 나는 회사를 떠나는 결정을 한다.


남은 10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책상을 정리하고, 노트북을 덥고, 수업 중인 학교 복도를 걷는 조용함으로 사무실을 걸어 나왔다. 35년을 근무한 조직을 떠나는 아쉬움보다, 남은 시간의 설렘임이 달콤한 노래를 불렀다."잘했어요. 우리 후회 없는 죽음을 위해 남은 10년을 살아봐요."


photo by pixabay


이제 죽음을 준비할 시간이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왕성한 경제활동을 하고, 사회봉사를 하고,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 타인의 삶도 당연히 훌륭한 삶의 태도이다. 아울러, 다소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죽음을 준비하는 내 삶의 방식도 존중을 받고 싶다. 내게 남겨진 시간의 크기는 알 수 없다. 10년쯤 내 의지로 살 수 있다면, 나는 웃음, 사랑, 음악, 글, 겸손 이런 단어로 채울 것이다. 그러한 작별의 인사를 위해,


별거 아니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크게 웃어야겠다.

웃는 입이 큰사람이라고 흉을 보더라도,  


세상에 둘도 없는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가 되어야겠다.

내 영정을 두고 엉엉 울 수 있도록,


조용조용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주해야겠다.

기타의 울림통이 전해오는 편안함이 내 심장을 채우도록,


정성을 다해 글을 써야겠다.

나만 재미있고, 나만 감동하는 글이라도,


하나씩 하나씩 꽉 잡고 있는 것들을 놓아야겠다.

유품 정리사가 할 일이 없더라도,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프란시스코 타레가가 작곡한 트레몰로 주법의 클래식 기타 곡


나의 죽음이 시작의 끝이고, 후회하지도, 아프지도, 힘들지도 않은 죽음을 맞고 싶다. 난 잘살았다, 행복했다, 감사하다는 유언으로,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여행자가 되어야겠다. 그래도 죽음의 사자가 마지막 소원이 머냐고 묻는다면, 잠깐 쉬어가자고 억지를 부려야겠다. "난, 지금이 너무 좋다." time to take off



내 죽음에 대해 영감을 준 책

•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김범석 -

마지막 질문 - 김종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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