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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Jul 17. 2024

너무 깊은 우울

16

너무 깊은 우울




 전등사 안 찻집 테라스

 칼날을 쥔 채 위협하는 위험한 열망의 남자처럼

 말벌 한 마리 네 모과차 찻잔을 기웃거렸지

 수천수만 번 날갯짓 속

 삐걱대는 목조계단을 밟고 올라와

 드디어 간절한 입맞춤을 얻었다는 듯

 말벌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뜨거운 찻잔에 목을 축였지

 끊임없이 연인을 탐미하는 눈감은 남자의 영원처럼

 세속의 모든 위협과 계산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맹목으로

 점점 더 가까이 극락 속에 몸 기울이는 것

 그것은 과연 얼마만큼 다디단 목적지일까 생각해보는데

 말벌은 그만 찻잔의 우물 속 온몸을 빠뜨렸다

 물에 타들어가는 불처럼

 너무 깊은 달콤함 속을 허우적대다 질식하고 만 중독처럼

 금세 동작을 멈추고 날개가 축 늘어지고 말았지

 저 달콤함 뒤 과연 무엇이 남을까

 그 고요함을 채 느끼기도 전에

 너무 깊은 행복감과 우울

 네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산새 가득한 산사의 가을나무가

 최선을 다해 피워낸 이파리들

 공중으로 지워내는 소릴 듣고 있었지

 교외의 사찰이 내뱉는 가을의 절정, 그 잔잔한 신음

 앙상한 궁극을 미확인한 채 눈감은 말벌의 파문처럼 시월 하늘이 번져가고

 너의 깊고 투명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죽일 수도 있는 칼 하나를 품고

 그러나 가장 달콤하게, 지나간 생에서 퇴장한 벌레가 되는

 그것이 나쁠까, 생각하기도 하면서

 너의 안에서 오래도록 흠뻑

 구석구석 모든 그림자가 녹아, 삼켜지도록

 화석으로 깊게 잠들고 싶었지




* 그 칼날의 결심. 달콤한 고통. 그것은 행복한 우울이었다. 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감정의 시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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