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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Sep 26. 2024

다연 누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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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연 누나에게.

 하율이가 누나한테 자꾸 편지 쓰고 싶다고 해서 이렇게 메일을 남겨. 생각해 보니 매번 톡은 주고받았지만 이렇게 편지로 쓰는 건 처음이네. 하율이한테 너는 아직 글자도 모르면서 무슨 편지를 쓰냐고 뭐라 했더니, 옆에서 할머니가 그러지 말고 정민이 네가 하율이 말하는 거 편지로 써주면 되지 않냐고 하시더라. 그래서 종이편지는 좀 그렇고, 그냥 이메일이 낫겠다 싶어서 이렇게 쓰고 있어.

 일단 하율이 말을 전할게. 하율이가 ‘언니, 보고 싶어. 언제 놀러 와? 새로 이사 간 집은 좋아? 언니가 선물해 준 라디오 맨날 듣고 있어. 색칠공부도 계속하고 있어. 빨리 놀러 와.’라고 편지에 써달라고 했어.

 하율이는 빨리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싶은가 봐. 한글은 내가 가르쳐 줘서 아주 조금은 읽을 줄 알지만, 영어도 배우고 싶고 친구도 많이 사귀고 싶대. 그리고 누나한테 주는 선물로 무슨 그림을 그렸더라. 내가 보기엔 대체 뭘 그렸는가 싶은데, 자기 딴엔 열심히 그린 거겠지. 우리 셋이 라디오를 듣는 모습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이메일에 사진 파일로 같이 첨부했어.

 생각해 보니 누나가 라디오도 주고 나한테는 태블릿도 거의 주다시피 빌려줬는데, 나는 누나한테 뭔가 준 게 하나도 없는 거 같애. 그래서 나도 짧은 만화를 그려봤어. 누나가 몰래 산타하면서 처음 우리랑 만나고, 하율이랑 나한테 선물 주던 날 이야기를 웹툰으로 그려본 거야. 아직 솜씨가 부족하지만, 예전에 누나가 말한 것처럼 누나랑 하율이를 주인공으로 그려본 거니까 잘 받아줘. 이것도 하율이 그림이랑 같이 첨부해서 보낼게.

 매번 카톡으로 얘기하다가 이렇게 길게 편지로 쓰니까 왠지 좀 어색하고 이상한 거 같다. 또 무슨 말을 쓰지? 그래, 할머니 소식을 전할게. 할머니는 여전히 식당일을 하시면서 건강히 잘 지내셔. 쉬는 날엔 언제나처럼 버드나무 평상에서 할머니들이랑 화투도 치시고. 아, 할머니가 다연 누나 자주 못 오니까 좀 허전한 거 같다고 하셨어. 할머니도 누나가 친손녀처럼 느껴지셨나 봐.  

 6학년이 되니까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거 같애. 일주일만 지나면 벌써 또 사월이라니. 최고 학년이 되니까 형들 눈치 보지 않고 운동장을 마음껏 쓸 수 있어서 좋아. 그래서 전보다 축구도 더 자주 하고 있어. 겨울방학 동안 키도 좀 큰 것 같애. 이제 150센티미터 넘을 걸? 누나 키가 몇 이더라? 160이었나? 곧 누나를 따라잡을 날도 멀지 않았어, 조금만 기다려.

 누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됐으니 공부하느라 더 바쁘겠지? 빨리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되고 싶다가도 공부 생각만 하면 그냥 초등학생으로 지내는 게 편해 보인다는 생각도 들어. 뭐,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겠지만.

 아직 작가가 되겠다는 장래 희망은 바뀌지 않았지? 여전히 글 쓰는 거 연습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누나가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어. 나도 웹툰 그려서 보냈으니까, 나중에 기회 되면 누나 글도 보여줘. 내가 잘 읽어볼게.

 나중에 카톡으로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냥 이메일로 써야겠다. 다음 달쯤 누나가 이사한 곳에 한 번 놀러 가 볼까 해. 사월 중순쯤에. 하율이한테는 비밀이야. 하율이한테 말했다가는 또 귀찮게 따라온다고 하겠지. 걔랑 같이 다니면 말이 많아서 시끄러워. 두 시간 가까이 지하철을 탈 텐데, 하율이랑 같이 간다고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할머니한테 허락받고 혼자 몰래 방문할 거야. 괜찮지? 그때 누나가 새롭게 자주 놀러 가는 데가 있다면 나도 한 번 소개해 줘. 또 좋은 그림 소재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오늘은 이만 쓸게. 글로만 길게 쓰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역시 난 그림으로 그려야 되나 봐. 메일 읽으면 답장 줘. 그럼 바이.             


  

 정민에게.

 메일 잘 읽었어. 하율이가 전해주는 말도, 할머니 안부도 고마워. 종종 카톡을 보내지만 또 이렇게 편지 형식으로 긴 글을 받아보니 새롭다. 정민이 너는 만화 그리는 것뿐 아니라 글도 쉽게 잘 쓰는 것 같아. 좀 부럽기도 하다. 나는 연습해도 잘 늘지 않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넌 예술적인 재능 같은 게 있는 걸까?

 하율이의 귀여운 그림과 너의 멋진 웹툰도 잘 받았어. 특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추억을 만화로 그린 네 그림솜씨와 구성에 감탄했어. 기억에 남는 장면을 그렇게 묘사하다니 대단해. 초등학교 6학년 실력이 아니고 그 이상이던 걸. 내가 기억하는 그날의 추억을 네 기억으로 다시 보니 새롭더라. 마치 하나의 이야기에 두 가지 버전이 있는 것 같았어. 하율이의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르겠지?

 하나의 이야기를 그렇게 각자 방식으로 풀어 나가다 보면 끝없이 우리 이야기들이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그건 뭐랄까. 같은 걸 두고 새롭게 해석하는, 소중한 사람들끼리의 어떤… 다르지만 아름다운 대화 같다고나 할까. 너무 문학적인가? 갑자기 진지해졌네.

 아무튼 네 웹툰 선물 정말 고마워. 내용을 떠나서도 내게 좋은 영감을 준 거 같아. 빌려준 태블릿이 하나도 아깝지 않아.

 여전히 글 쓰는 거 연습하는지 물어봤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이번 꿈은 아마도 꽤 오래 내게 머물지 않을까 싶어. 공책이나 컴퓨터에 뭔가 끼적이다가 글이 막히면, 예전에 내가 말했던 영화의 주인공 ‘몬티’의 말을 자주 떠올려. ‘너만의 것을 봐야 돼. 안 보이는 걸 찾는 걸 멈추면 안 된단다.’는 그 말. 그리고 영화 속 아홉 살 핀처럼 나를 믿는다는 너의 말도. ‘누나가 꼭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될 거라고 믿어.’라고 말했던 거 기억하니?

 정민이 비록 네가 다섯 살이나 어린 동생이지만, 너는 내게 상당히 많은 자극을 주고 있어. 꿈을 위해 멈추지 않는 꾸준한 노력과, 보이지 않는 걸 새롭게 표현하는 너의 상상력을 통해서. 고마워. 너는 참 고마운 동생이야. 낯간지러워서 톡으로는 표현 못했지만 언젠가 꼭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그리고 정민이 네가 이번에 짧은 웹툰으로 그린 것처럼 나도 너랑 하율이, 우리가 만난 지난 일 년 간 얘기를 이야기로 써보고 싶어졌어. 조금은 상상력을 섞어가면서 다소 새롭게. 나 할 수 있겠지?

 다음 달에 이곳에 놀러 온다는 계획은 변함이 없는 거니? 너무 멀리 혼자 온다고 하니까 조금 미안하네. 창동역에서 쭉 4호선을 타고 두 시간 정도 달려와야 할 거야. 네가 날짜를 알려주면 꼭 역으로 마중 나갈게.  

 삼월엔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느라 나도 미처 너네 집에 갈 시간이 없었어.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진짜야. 그래도 개학 한 달 만에 친구들도 제법 사귀고 절친도 한 명 만들었어. 박상민이라는 친구인데, 얘도 너처럼 웹툰 작가가 되는 게 꿈이래. 우리는 며칠째 급식을 함께 먹으면서 진로에 관해서도 얘기했어. 대학진학도 생각해야 하니까, 우리 둘 다 분야는 다르지만 창작 학원을 다녀야 하나 고민하고 있어.  

 어쨌든 조만간 네가 찾아온다고 하니까 오랜만에 얼굴 보겠구나. 키가 조금 컸다고? 한 번 비교해 봐야겠네. 이제 더 듬직한 남동생이 돼가는 건가? 하율이도 보고 싶긴 하다. 하지만 하율이는 아직 어리니까 하율이 만나려면 내가 서울을 가야겠지. 네가 사월에 온다고 했으니까, 난 오월 날씨 좋은 주말에 한 번 올라갈게.

 종종 카톡을 주고받는데도 쓰다 보니 길어졌다. 편지를 쓰는 건 이메일이든 손편지든 뭔가 다른 느낌을 주는 거 같애. 우리 종종 이렇게 메일 주고받는 것도 괜찮을 거 같지 않니? 그럼 나도 이만 줄일게. 하율이랑 할머니한테 안부 전해주고, 너도 잘 지내. 다음 달에 곧 보자. 안녕.


 (추신 : 벚꽃 필 때 맞춰서 오면 내가 좋은 데로 안내해 볼게. 나도 아직 꽃 핀 모습은 못 봤지만 상민이가 추천한 좋은 산책로가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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