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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여름

VOL.32 / 2025. 9월호. 짧은 소설_10

by 숨 빗소리

스무 살의 여름


1


2002년 그 여름방학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곤 새내기 1학기 컴퓨터 교양 수업에서 배운 자바스크립트로 몇몇 초보적인 기능을 활용해 개인 홈페이지를 만든 것뿐이었다. 들어오는 첫 페이지를 빗물이 흘러내리는 흑백 이미지로 꾸미고, 2001년 개봉했던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의 OST중 대표곡인 「One Fine Spring Day」를 배경음악으로 넣었다. 스무 살의 우울하고 센티멘털한 감성으로 잔뜩 힘을 준 홈페이지 제목도 있었는데, ‘고독의 습작’이었는지 ‘습작의 고독’이었는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류시화 시인의 시와 이회수 작가의 글들을 인용해 ‘청춘 뭐 어쩌구―’하며 페이지의 읽을거리를 꾸미곤 유료 게시판 기능을 끌어와 어설프게나마 방명록까지 만들었다. 대략 홈페이지가 완성되자 이제 남은 일은 방문객을 끌어 모으는 일이었다.

‘어쩐담? 포털에 등록해야 하나?’

당장 익명의 사람들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습작’이니 ‘고독’ 따위를 입력해서 내 홈페이지를 방문할 것 같진 않았다. 지금 눈높이로 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그땐 뭐가 그리 자신 있었는지, 그 홈페이지의 주소를 가까운 중고등학교 친구들에게 홍보 차 문자메시지로 보내기로 했다.

‘방학 때 심심해서 홈페이지 개설했다. 이게 주소니까 놀러 와서 방명록에 글 남겨주면 감사~’

핸드폰 주소록에서 문자메시지를 보낼 친구들을 고르다가 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중학교 시절 짝사랑했던 애의 이름이었다. 어떻게 그 애의 번호를 그때 갖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그 애에게도 홈페이지의 주소를 보냈다.



2


대학 첫 학기를 마치고 시골로 내려와 이십대의 첫여름을 보내던 그 시절, 대학생이 되었지만 내 생활은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다. 연애도 한 번 해보지 못했고, 이혼한 아버지와 할머니만 계시는 시골집에 와서도 고등학교 때처럼 농사일을 도우며 시간을 때울 뿐이었다. 칠월 말에 있는 스무 살 생일 즈음이 되자 왠지 그런 내 모습이 약간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적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산 이후 특별히 생일을 챙겨 받은 기억이 없었다. 꼭 생일을 축하받고 싶었다기보다 아무도 내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 듯해 더 외롭다는 생각이 들던 날이었다.

왜 스무 살 당시에도 ‘스무 살’은 특별한 나이처럼 느껴지는 걸까. 내가 좋아하는 한 소설가는 그의 단편소설에서 이런 문장을 남겼다.


열심히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일도 하지 않든 스무 살은 곧 지나간다. 스무 살의 하늘과 스무 살의 바람과 스무 살의 눈빛은 우리를 세월 속으로 밀어넣고 저희끼리만 저만치 등뒤에 남는 것이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보다도 더 빨리 우리 기억 속에서 마르는 스무 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 김연수 소설, 「스무 살」중에서


생일 당일, 그날만은 무더위 속 농사일을 돕는 걸 미룬 채 홀로 시외버스를 타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특별한 약속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익숙한 대학가에서 혼자만의 생일을 보내고 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신촌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근처 녹색극장에서 하지원, 김유미 주연의 납량특집 공포영화 『폰』을 홀로 관람했다. 친구나 연인들끼리 온 관람객들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러댔지만 혼자만의 고독에 둘러싸인 내겐 영화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로 점심을 먹은 후 서점에서 한 시간 동안 서서 책을 읽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할 일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한두 시간 동안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여름날의 거리와 대학 캠퍼스를 배회하다가, 나는 다시 시골로 내려가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다.

버스가 도심을 벗어나자 여름 더운 바람에 출렁이는 초록빛 벼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버스에서 줄곧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워커맨으로 김광진의 슬픈 발라드를 들었다. 그때 내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던 건 김광진의 「편지」라는 곡이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하고 싶은 말 하려 했던 말 이대로 다 남겨 두고서

혹시나 기대도 포기하려 하오 그대 부디 잘 지내시오

(후렴)

기나긴 그대 침묵을 이별로 받아 두겠소

행여 이맘 다칠까 근심은 접어두오

오오 사랑한 사람이여 더 이상 못 보아도

사실 그대 있음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왔음에 감사하오

좋은 사람 만나오 사는 동안 날 잊고 사시오

진정 행복하길 바라겠소 이 맘만 가져 가오


노래를 듣다가 마음이 더 우울해진 나는 핸드폰을 꺼내 용민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고3 때 통학시간을 줄이려 읍내에서 함께 자취생활을 했던 용민과 나는, 비록 서로 다른 대학교에 진학하긴 했지만 새내기 때만 해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던 고향친구였다.

‘스무 살 생일인데 할 거 없어서 혼자 신촌 와서 영화 보고 밥 먹고 다시 집에 간다’

용민에게서 곧바로 답장이 왔다.

‘혼자 뭔 청승이냐, 차부 뒤 공터에서 만나자’

수원에서 대학을 다니던 용민 역시 방학이라 시골에 내려와 있던 상태였다. 차부 뒤 공터에서 갑자기 만나자니, 용민의 메시지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나는 가타부타 뭐라고 답장하지는 않았다.



3


“자, 이거 받아라.”

버스에서 내려 터미널 공중전화박스 뒤 공터로 가보니, 용민이 뭔가로 가득 찬 편의점 비닐봉지를 들고 서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용민이 비닐봉지에서 꺼내 내민 것은 카프리 맥주 한 병이었다.

“뭐야, 이게?”

“뭐긴. 생일주다.”

그리곤 다시 비닐봉지에서 자신 몫의 맥주와 새우깡을 꺼내 공터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생일이 뭐 별거냐 친구랑 함께 술 한 잔 하는 게 진짜 의미 있는 생일이지, 라며 그대로 병째로 짠―을 한 용민은 내게 같이 마시길 권했다.

“더우니까 우선 시원하게 맥주 한 잔 해라. 이게 다가 아니다.”

다시 주섬주섬 비닐봉지를 뒤지던 용민은 초코파이 한 개를 꺼내 뜯은 후 새우깡 과자봉지 위에 올려놓았다.

“거창한 케이크는 아니지만 구색은 갖춰야지. 다만, 초는 준비하지 못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스무 살 내 생일을 그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축하하고 위로해 주던 용민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스무 살 이전에는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소박하지만 특별한 생일 축하였다.

여름날 생일 시즌이 다가오면 지금도 그때의 용민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습하고 더운 날씨 속 야외에서 맥주병 나발을 불던 스무 살 여름의 추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다음날 홈페이지 방명록 게시판에 기대하지 않았던 작성자의 이름이 올라와 있던 것도.

무더운 바람 속 초록색 벼포기가 아련히 출렁이고, 슬픈 멜로디 한 가락에도 눈물방울이 맺히던 스무 살. 그 시간들은 이제 어느 별, 어느 행성에 머나먼 빛으로 닿아있을까. 지금은 용민과도 연락이 끊어지고 과거 친구들과도 멀어져 모두 멀고 먼 추억이 되었지만, 스무 살 여름하면 그때의―어설프고, 고독하고, 실망하고, 설레던―여러 감정들이 뜯겨나간 달력의 빨간 동그라미처럼 떠오를 때가 있다.


(끝)


허민 – 2015년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으로 시를, 2024년 계간 『황해문화』 창작공모제를 통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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