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35 / 2025. 12월호. 짧은 소설_12
“이제 다시 영상 찍는 거야?”
아빠가 부산에 가자고 했다. 아빠는 여행 유튜버였다. 내가 학교를 쉬는 주말마다 아빠는 나와 전국을 누비며 여행을 다녔고, 그것을 영상에 담아 채널에 올렸다. 채널명은 두 가지 의미가 담긴 ‘부자 여행’. 열 살 아들과 단둘이 떠나는 중년 아저씨의 평범한 여행에 구독자들은 예상치 못한 응원을 보내주었다. 아빠는 초딩다운 내 순수한 매력이 조회수에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한창 성장하던 아빠의 유튜브 채널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구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편집과 업로드를 잠시 쉬던 중이었다.
두 해 전 엄마가 하늘나라로 떠난 후 아빠는 회사를 그만두고 유튜브 채널 운영에 집중했다. 아빠는 그게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한 방법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우리와 같이 살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할머니는 아빠와 내 밥을 챙기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마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고 만 것이다.
장례가 끝나자 아빠는 일주일 동안 밖에도 나가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잠만 잤다. 이러다가 아빠도 영영 깊은 잠에 빠지는 건 아닐까 걱정될 무렵, 아빠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번엔 영상 안 찍을끼다. 부산 가 같이 볼 사람 있다.”
아빠는 인천 출신인 엄마와 결혼하고 줄곧 인천에서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빠의 고향은 부산이었다. 학교를 모두 부산에서 나왔다고 했다. 할머니 역시 부산 산동네에서 전쟁 중에 태어나셨고, 그곳에서 자라 결혼까지 하셨다고 들었다.
전업 유튜버가 되고부터 아빠는 부산에 간 적이 없었다. 너무 익숙한 곳이라서 나중에 할머니랑 같이 가보자고만 말했다. 그 미뤄두었던 부산을 할머니마저 없는 지금 단둘이 가게 되다니.
“누구 만나러 가는 건데?”
영상을 찍을 땐 늘 기차나 버스를 타곤 했지만, 이번에는 아빠 차를 몰아 부산으로 갔다. 부산역 근처 차이나타운에 차를 대고 아빠와 짜장면을 먹었다. 식사를 끝낸 후 우리는 초량초교 옆 이바구길을 걸어 올라갔다. 마을 역사가 담긴 사진과 그림들이 벽을 따라 이어졌다. 오월이라곤 하지만 벌써 햇볕은 따가웠다. 오르막과 계단을 지나 우리가 다다른 곳은 세모 지붕이 달린 우물터였다.
“여기서 니 엄마 첨 봤다 아이가.”
아빠는 초등학생 때까지 이 동네에서 살다가 다른 동네로 이사 갔지만, 종종 옛 친구를 만나러 이곳에 왔다고 한다. 아빠가 대학생 때, 친구와 부산 여행 온 엄마를 여기서 만났고, 엄마에게 첫눈에 반한 아빠는 가이드 역할을 자처했다고. 우물은 6·25전쟁 후 산지에 터를 잡은 피란민 가족의 식수였고, 이곳에서 태어난 할머니도 어릴 적 168계단을 오르내리며 물을 길었다고 한다.
“그럼 여기서 누구 만나기로 한 거야?”
아빠는 고개를 저으며 우물 옆 긴 계단 꼭대기를 가리켰다. 고개를 들어 올려 봐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었다. 계단 옆 엘리베이터를 타자고 말했지만, 아빠는 안 된다고 했다. 그걸 타면 우리가 만날 사람을 만날 수 없다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모처럼 기운을 낸 아빠에게 투정을 부릴 수 없었다.
계단을 오르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몇 번이나 중간에서 숨을 골라야 했다. 쉬는 건 괜찮아도 아빠는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힘들면 그 계단을 매일같이 올랐을 할머니를 떠올려보라고 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할머니는 어릴 적 그곳을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로 상상하며 물을 길었다고 했다. 포기하면 나중에 천국에 갈 수 없을 거라고 주문을 걸면서. 할머니는 결국 천국에 닿으셨을까.
아빠는 엄마와 처음 만나 그 계단을 오를 때 이야기도 들려줬다. 숨이 차 힘들어하는 엄마에게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다 오르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얘기가 옛날부터 전해져 온다고. 피아노건반 밟듯 계단을 연주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즐겁게 올라가 보자고. 나는 아빠의 얘길 들으며 그때의 엄마를 상상하면서 계단을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그리운 엄마와 할머니의 옛 모습을 그리면서 결국 끝까지 계단을 올라갈 수 있었다.
“여기서 부산 다 보인다.”
꼭대기에 올라 아빠 옆에 섰다. 계단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내가 어떻게 저곳을 올라왔는지 좀 전의 시간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만날 사람은 어딨어?”
아빠는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 멀리 부산항과 영도 바다를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니…도 저기 좀 봐라.”
아빠가 나만할 때, 아빠도 할머니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와 저 먼 바다의 풍경을 함께 바라봤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니 아부지랑도 여기서 이렇게 같은 데 바라봤다. 같은 데 바라볼 때면 왠지 그 순간이 영원 같제.”
아빠는 말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봤던 풍경, 그리고 할머니와 어린 아빠, 또 대학생이던 아빠와 젊은 엄마가 함께 느끼던 이곳에서의 영원. 그렇게 생각하고 바라보다 보면, 우리가 만나기로 한 그 사람은 언제 온지도 모른 채 바로 옆에 서 있을 거라고. 과거를 지나 현재의 계단을 함께 걸으며,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그 언제까지라도.
(끝)
허민 – 2015년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으로 시를, 2024년 계간 『황해문화』 창작공모제를 통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