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37 / 2026. 2월호. 짧은 소설_14
대학시절 문예창작 동아리에서 함께 열정을 불태우던 동기와 선후배들이 취업과 동시에 모두 문학판을 떠났다고 느낀 서른 무렵, 그는 여전히 아무도 봐주지 않는 무명의 시를 끄적이고 있었다.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던 꿈. 그것마저 내려놓으면 그나마 미약하게 남아있던 청춘의 마지막 이파리마저 모두 지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서른 중반이 된 그가 늦깎이로 한 지역의 독립언론 기자가 되었을 때, 그 역시 시 쓰기를 그만두고 말았다. 그렇게 점점 희미해지는 꿈의 그림자처럼 청춘의 푸른 잎사귀들은 하나둘 곁을 떠나가고 있었다.
기자 생활 이 년여가 흐른 어느 겨울, 그는 모처럼 닷새간의 휴가를 얻어 타이완으로 홀로 여행을 떠났다. 고등학교 때 가족과의 여행 이후 해외여행이 전무했던 그는 한 여행사를 통해 3박 4일의 타이베이 패키지 투어를 신청했다.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에서 여행사 가이드와 미팅을 마치고 타이완 쑹산공항에 도착해 투어 버스에 탑승했을 때, 그는 패키지 투어에 일행 없이 홀로 참여한 사람은 저뿐이라는 걸 알았다. 유일한 말벗은 사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중국어가 유창한 베테랑 가이드뿐이었다.
용산사, 중정기념당, 타이베이 101 전망대, 국립고궁박물관 등을 투어 버스를 타고 편안히 돌며 구경했지만 특별한 감흥은 일지 않았다. 이동 거리가 길지 않아서 그다지 피곤함도 들지 않았다. 간혹 자유 시간이 주어져 점심식사를 스스로 해결해야 할 땐, 중국어에 서툰 그로서는 그마저도 가이드가 알아서 해결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둘째 날 투어를 끝낸 밤엔 숙소 바로 옆 편의점에서 타이완 캔맥주를 산 후, 단수이강(淡水河)이 내려다보이는 11층 호텔 창가에서 혼술을 했다.
‘겨우 이런 게 여행인가.’
‘이렇게 젊은 시절이 모두 흘러가는구나.’
‘화려한 도시 불빛 속, 저 몰래 캄캄히 흘러가는 강을 닮았구나.’
어느덧 여행의 셋째 날이 밝았다. 내일이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허탈감을 느꼈다. 예류지질공원 관광을 마치고 스펀(十分)에서 천등을 날리는 체험을 할 즈음부터 가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해 상점들 지붕 밑을 따라 이동하기에 급급했다.
투어 버스의 마지막 목적지는 타이완 북부 산간 마을 지우펀이었다. 전통적 건축 양식과 붉은 등불이 어우러진 마을의 밤 풍경은 마치 동화 속 분위기처럼 신비롭게 느껴졌다.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은 관광객들이 마을 골목의 포토 스팟에서 일행들과 사진을 찍을 때 그는 곁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한두 장의 풍경 사진만을 찍었을 뿐, 그 순간을 남들만큼 간절히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투어 버스로 돌아갈 때까지 아직 한 시간 가까이 남아 있어서 그는 ‘九份’이라고 쓰인 붉은 등불이 줄줄이 매달린 골목이 내려다보이는 술집에 들어갔다. 비도 피하면서 시간도 때울 겸 간단한 안주와 맥주를 한 병 시켰다. 술집 가장자리에는 통창을 따라 마을을 굽어보는 자리가 빙 둘러 있었다. 그는 구석의 빈 두 자리 중 가장 끝에 자리를 잡았다.
“혼자 오셨어요? 혹시 한국사람?”
그가 빗물이 흐르는 창 너머로 마을 전경을 내려다보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을 때, 빗물에 젖은 우산을 접으면서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연상의 여인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 네.”
“나도 혼자인데, 자리가 여기밖에 없네요. 앉아도 되죠?”
그녀는 그렇게 물으면서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옆에 와 앉았다.
“혼자 여행 오신 거예요?”
“아, 네. 아니 근데 패키지여행이라서 일행은 있어요. 그러니까 잘은 모르고 며칠째 같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한국인 일행들요.”
“아, 그러시구나.”
그녀는 안주도 없이 그와 똑같은 맥주를 한 병 주문한 후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일행인척 술만 주문하기.”
“아, 이거 제가 시킨 거, 같이 드세요.”
그녀는 그가 보기에 자신과 달리 외향적이고 쾌활해 보였다. 창 너머 풍경을 바라보는 척 슬며시 그녀의 옆모습을 잠시 살펴봤다. 옅은 화장에 뿔테 안경을 쓰고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어쩌면 비 내리는 지우펀 마을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그녀를 한층 더 매혹적으로 느끼게끔 만드는지도 몰랐다.
‘이런 게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만남인가?’
쓸쓸하면서도 단조롭다고 느낀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러 그의 심장이 가장 크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맥주가 몇 모금 들어간 김에 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쪽은 혼자 여행 오신 거예요?”
“아, 네. 원래 혼자 자주 다녀요. 아니 거의 혼자 다닌다고 해야 하나?”
“아니, 왜요? 친구들이나 가족도 있으실 테고.”
그녀는 자신이 여행 작가이고 오래전부터 이런 생활을 꿈꿔왔다고 말했다. 서른 초반까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뒤부터 줄곧 국내든 국외든 어딘가를 향해 홀로 떠나왔다고. 직장에 다닐 때도 오직 여행 작가의 꿈을 꾸며 버텨왔다고 했다.
“자본금이 모이자 바로 실행에 옮긴 거죠. 요즘은 책이 하도 안 팔려서 거의 여행 유튜버가 돼버렸지만.”
그래도 이번 타이완 여행만큼은 아무런 촬영 장비도 없이 오직 여행만을 위한 여행을 위해 떠나왔다고 덧붙였다. 간간이 영감을 준 장소에서 여행의 문장들을 아날로그적으로 수집할 뿐. 익숙한 현실을 떠나 이방인이 되어 낯선 골목들을 서성일 때면, 마치 무선노트 위 한 자루 연필처럼 자유로움을 느낀다고도 했다.
“대단하세요, 여행 작가라니.”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는 거뿐이에요. 정해진 방식대로만 사는 걸 못 참는 성격이라서.”
그는 자신도 한때 시를 쓰던 시인 지망생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다 말았다.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못한 지 이 년이 넘었다. 구태여 이루지 못한 꿈 따위를 처음 본 사람에게 궁상맞게 떠벌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가끔은 불안하기도 해요.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그럴 때마다 지난 직장 생활이 도움이 돼요.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를 다시 떠올리면 지금이 훨씬 나으니까. 제 꿈을 차근차근 이루며 사는데 직장이 그런 식으로 도움을 줄 줄이야.”
“…….”
“저보다 어려 보이는데, 직장인? 휴가 온 거예요?”
“네.”
“혼자 온 거 보니 애인 없구나?”
“…….”
“다음에 해외여행 올 땐 패키지 말고 자유여행으로 와보세요. 처음엔 막연하고 힘들어 보여도 그게 더 젊어지는 비결이에요.”
“젊어진다고요?”
그녀는 자신이 여행 작가를 꿈꿔온 것은 늘 꿈꾸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하나의 목적지에 닿아 그 여행지를 돌고 나면 언제든 자신의 발길을 기다리는 또 다른, 그러나 정해지지 않은 목적지를 따라 흐르는 삶. 그 서툴고 때론 길을 잃는 여정 자체가 자신이 꿈꾸던 삶 그 자체라고.
“패키지여행을 하면 버스를 잘못 타거나 길에서 방황할 일도 없잖아요. 갑자기 내키는 대로 일정을 바꿀 수도 없고.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어느 에세이에서 밝혔거든요. 낯선 도시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행자면서 젊은이가 될 수밖에 없다고*. 젊은 시절엔 꿈과 가능성이 무궁하지만 반대로 그래서 더 자주 길을 잃고 방황하기도 하잖아요. 어쩌면 그 자체가 젊음의 증거 아닐까요. 익숙지 않고 늘 서툴다는 것. 자유여행은 마치 그런 서툰 젊은 날처럼 그 도시를, 그 나라를, 그 안에서의 변화무쌍한 이야기를 제멋대로 겪는 것과 비슷해요. 아니 꼭 진짜 그런 느낌이 들어요. 한없이 자유롭지만 외롭고, 때론 고립되지만 나도 모르는 어딘가를 향해 내 의지로 가고 있는 여정. 패키지여행을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그건 정해진 항로만을 반복하는 어른들의 안정된 삶 같아서.”
“…….”
“나이 먹은 사람이 너무 꿈같은 이야기만 하죠?”
“아니에요. 요즘 제게 딱 필요한 말씀이었어요.”
창 너머 골목의 붉은 등불들이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내면에 깊게 잠든 오래전 문장들도 물기에 젖은 채 부풀고 있던 걸까.
“패키지 투어면 이제 금방 되돌아갈 시간 아니에요?”
“네, 아마도.”
그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투어 버스로 돌아갈 시간이 십오분 정도 남아 있었다.
“자유여행 오신 거면 이 산간 마을에서 어떻게 도시로 내려가세요?”
“대중교통? 버스 없으면 택시를 불러도 되고요.”
“타이베이에 머무세요?”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맥주잔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는 왠지 그녀의 자유로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그는 생각했다. 정해진 줄거리대로만 이 여행을 흘려보낼 것인가, 아니면 여행의 막바지를 완전히 새로운 결말로 끌고 갈 것인가. 어디선가 길을 잃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한없이 방황하던 옛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실래요? 가이드 좀 만나고 올게요.”
“네?”
“가이드에게 지금부터 전 일행에서 빠진다고 말할게요. 저도 꿈같은 여행을 단 하루만이라도 만들고 싶어서요. 여기서든 타이베이 내려가서든 우리 이차 한 잔 해요.”
(끝)
*김연수 여행산문집 『언젠가, 아마도』 39쪽 인용.
허민 – 2015년 웹진 『시인광장』 신인상으로 시를, 2024년 계간 『황해문화』 창작공모제를 통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