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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Mar 29. 2020

낯선 익숙함



간호사가 저 멀리서 반갑게

오랜만이에요 하고 인사한다

난임 병원에서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면 슬픈 사이






서류 뭉치가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난자 채취를 하기 전에는 여러 종류의 서류에 서명을 해야 한다. 내 몸 상태를 체크해서 내는 서류부터 해서 시술 과정 중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돌발 상황이나 사고 가능성, 합병증 및 후유증, 시술 방법 변경 가능성, 집도의 변경 가능성, 보조 시술 동의서, 마취 동의서, 배아 생성 동의서 등을 채취 전에 제출해야 한다. 이번에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취소, 변경 가능성이 있음을 알리는 동의서도 추가되었다. 가뜩이나 조심해야 할 일들이 많은 일인데 코로나까지 합류했다. 처음 이 서류에 서명을 할 때에는 적혀 있는 말을 읽고 또 읽으며 내가 서명하는 서류를 이해하려고 애썼고, 종이에 적혀있는 무서운 말들을 읽으며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이 서류 안에는 무서운 말들이 참 많이 적혀 있다. 서류를 읽다 보면 지금까지 사고 없이 채취를 할 수 있었던 지난 6번의 채취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올라온다.


7번째 채취를 앞둔 지금, 서류에 서명을 하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다. 이제 곧 채취를 하는데 이런 무덤덤이 없다. 이런 내 모습에 잠시 멈칫한다. 이젠 서류를 자세히 보지 않아도 무슨 내용인지도 알고 간호사가 서류에 표시를 빼먹어도 알아서 체크하고 서명을 할 줄 알기 때문에 이맘때 느꼈던 설렘, 기대, 긴장 같은 감정들이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7번째 채취쯤이면 무감각해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고, 아무 생각 없는 나의 모습이 긴장하며 걱정하는 것보다 더 감사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무감각해진 내 모습이 슬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젠  모든 과정이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가.  정도의 채취 경험이면 간호사 설명 없이도 주사를 놓는 일부터 채취까지 혼자서도 잘할 일이다. 그렇다면 익숙해지는  좋은 일이 아닌가 라고 묻는 이도 있겠지만 시험관은 다른 일과는 다르다. 일에 있어서 익숙함은 서투르지 않게 일을 마무리할  있는 장점이 있겠지만 시험관은 여러  반복이 되어  주사 놓는 실력이 간호사 뺨치게 향상될수록 슬픔이 쌓이는 단점이 있다. 일은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고 성취를 가져다주겠지만, 이는 쌓여 가는 실패 위에 쇠약해져 가는 몸과 황폐해져 가는 마음을 남겨주기 때문이다.  슬픈 것은  모든 과정이 익숙함이라는 이름으로  삶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서명을 하다 말고 지금  앞에 펼쳐진 상황들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낯선 익숙함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솔직히 아직은 모르겠다. 어쩌면  많은 시간을  익숙함과 함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정도의 낯선 감정 대해  깊이 고민하고 말고 할 시간도 . 어쩌겠는가. 일시적인 감정은 뒤로 물리고 현실에 충실할 수밖에.


남편이 서명해야 하는 부분을 포스트잇으로 붙여서 볼펜과 함께 서류를 남편에게 내민다. 익숙하게 서류를 받아 서명을 하는 남편에게 “슬퍼”라고 말하니 서명을 하다 말고 놀라서 쳐다본다. “채취를 한다는데 너무 무덤덤해져서"라고 말하며 그냥 이렇게 내 감정을 털어낸다. 내가 가진 노련함으로 내일 잘하고 와야지 해본다. 그러면서 이번이 마지막 채취가 되면 좋겠다고 하늘을 보며 은근히 떼도 써본다. 이번에 소박하게 배아 2개,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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