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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Mar 13. 2020

어느 채취 날

서로 떨어진 채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응원한다 

오늘 우리의 정자와 난자가

잘 만날 수 있기를 







오전 7시 50분


<여자 이야기>

양 손목에는 종이로 된 이름표가 팔찌처럼 둘러져 있다. 거기엔 나와 남편의 이름 및 생년월일 그리고 담당 선생님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 종이를 곰곰이 보고 있자니 운명 공동체 같은 끈끈함이 느껴진다. 왠지 모를 든든함도 느껴진다. 내 이름이 불렸다. 남편과 문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채취실로 들어간다. 여러 번 들어온 곳이지만 이곳 공기는 항상 낯설다. 옷을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수술 모자를 쓰고 렌즈와 반지를 빼고 화장실을 한번 다녀오면 채취 준비 끝. 수면마취를 하기 때문에 손톱에 매니큐어는 물론 없어야 하고 몸에 부착된 장신구 및 렌즈까지 다 빼야 한다. 눈이 상당히 나쁜 편이라 렌즈를 빼면 모든 게 몽글몽글하게 보인다. 그래서 사실상 채취 대기실 및 수술실을 시각이 아닌 후각과 촉감으로 기억한다. 대기실에는 대여섯 명의 동지들이 채취 혹은 이식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 앉아있으면 간호사가 와서 신분확인 후 링거 주사를 놓아준다. 그리고 다시 대기. 켜져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누군가가 나와서 떠들고 있으나 이에 집중하는 이는 없어 보인다. 그냥 긴장감이 가득한 이곳을 그나마 채우는 소리일 뿐이다. 화면도 흐릿하게 보이는 탓에 텔레비전을 응시하는 대신 손에 둘러진 팔찌를 본다. 그리고 남편 이름과 선생님 이름을 보며 오늘 채취가 잘 되길 빌어본다.



<남자 이야기>

아내가 채취실로 들어갔다. 간호사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이름을 부른다고 했다. 대기실에는 많은 남자들이 대기 중이다. 다들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만 서로를 엄청 의식 중이다. 조만간 일어날 일에 대한 긴장감, 나만 이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는 위로, 서로의 사정이 궁금한 호기심 등이 한데 모여 복잡 미묘한 감정이 이 조용한 대기실에서 이리저리 움직인다.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다. 처음 채취하는 사람과 여러 번 해본 사람이 구분된다. 이 일을 대하는 여유의 차이라고 할까. 여러 번 해본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flex는 첫 방문자는 절대 따라 할 수가 없다. 처음 채취하러 왔을 때가 생각난다. 모든 게 낯설어서 화장실도 못 가고 꾹 참으며 그 자리를 지켰다. 지금은 바로 이름을 불리는 것이 아닌 걸 알기에 편안하게 볼일을 보고 오고 간호사만 바라보지 않고 핸드폰을 하며 기다리는 여유가 생겼다. 이곳은 먼저 온 순서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채취 여부에 따라서 출동명령이 내려진다. 대기실에 있는 모니터에는 대기 중, 수술 중, 회복 중이라고 적혀있고 상황에 따라 아내의 이름이 그 아래에 나타난다. 아직 아내는 대기 중이다.



<여자 이야기>

간호사는 내 이름과 생년월일을 먼저 물어보고, 그다음에 남편 이름, 담당 선생님 이름, 난포 터지는 주사를 맞은 시간을 차례차례 물어본다. 손목에 적혀있는 정보와 내가 말하는 정보를 다시 체크하면서 나의 신분을 확인한다. 그리고 간호사와 함께 채취실로 이동. 긴 복도를 따라 쭉 따라가다 보면 유독 불빛이 환한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수술실이다. 수술실에 들어가면 초록색 수술복을 입은 간호사들이 여러 명이 있는데 일명 굴욕 의자라는 곳에 다리를 올리고 누우면 간호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내 다리와 손을 묶고 가림막으로 내 시야를 가리고 수술 준비를 한다. 수술대는 언제 누워도 차갑다. 한기를 느끼는 건지 긴장한 건지 몸이 떨릴 무렵 담당 선생님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잠깐 동안의 정적. 선생님이 마음을 모으는 시간인가 보다. 선생님의 마음에 나의 기도를 얹어본다. 마취과 선생님의 ‘마취 들어갑니다’라는 소리와 함께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다. 두려운 마음도 잠시, 얼굴이 한껏 달아오르고 기침이 나오기 시작한다.



<남자 이야기>

내 이름을 드디어 부른다. 모니터 상에 아내는 회복실로 이동했다. 채취실로 들어가면 방이  두 개가 보인다. 그중 한 곳으로 한 남자가 들어가는 게 보인다. 안에 있는 간호사에게 신분증과 카드를 주고 아내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말한 뒤 나도 남은 다른 방으로 들어간다. 방에 들어오면 아주 푹신해 보이는 긴 의자가 바로 보이고 그 옆에는 세면대, 비누, 쓰레기통, 정액을 담을 일회용 통이 보인다. 그리고 모니터엔 한 젊은 남녀가 벌써부터 열정적으로 엉겨 붙어 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무척 당혹스러웠다. 어렸을 때나 방문 걸어 잠그고 숨어서 하던 일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여러 사람의 지지를 받게 되다니. 의자 옆, 친절하게 놓인 휴지를 보니 웃음이 삐져나온다. 아무리 시험관 시술을 위한 당연한 과정이라고 해도 매번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느끼는 민망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처음이고 여러 번이고 이곳은 아무리 와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대기실에서 누렸던 여유는 사라지고 긴장감이 올라온다. 외투를 벗고 의자에 앉는다.



<여자 이야기>

자동으로 혈압을 재는 기계소리에 놀라 깬다.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딘가. 기침했던 기억까지만 난다. 주변을 둘러보니 회복실이다. 다시 잠을 청해보려 하지만 한번 깬 잠은 쉽게 오진 않는다. 팔에 꽂힌 링거를 본다. 약이 얼마가 남았는지를 보려 하지만 잘 안 보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한다. 팔에는 어김없이 볼펜으로 그려놓은 동그라미가 있다. 언제 동그라미를 그려놨는지는 기억엔 없는데 항생제 반응을 보기 위해 표시를 한다고 한다. 의식을 차리니 잠시 잊고 있던 난자 걱정이 올라온다. 남편은 잘하고 있을지도 궁금해진다. 제발 건강한 난자와 정자가 나왔기를 바라며 회복실에서 나갈 시간을 기다린다.



<남자 이야기>

방에서 나오니 다른 방에 있던 남자가 먼저 나와 무언가를 쓰고 있다. 간호사는 나에게도 스티커 종이 두 장과 펜을 준다. 그 남자가 서류 작업을 할 동안 뒤에서 기다린다. 기다리며 그 남자의 통을 힐끗 한번 쳐다보고 내 통을 한번 본다. 남의 것을 본다고 뭘 아는 것도 아닌데 괜히 궁금하다. 간호사가 준 스티커 중 한 장은 아무것도 안 쓰여있고 다른 한 장에는 나와 아내의 정보가 프린트되어 있다. 빈장에는 내가 직접 내 이름과 아내 이름을 적어서 통에 붙이고, 그 아래에 프린트된 스티커를 붙인다. 마지막으로 두 개의 정보가 맞는지 확인하고 이를 확인했다는 서류에 사인을 하고 통을 낸다. 따뜻함이 남아있는 이 통을 여자 간호사와 주고받는 게 민망했던 시절도 있지만 이젠 낯도 뻔뻔해졌다. 이렇게 이번 차수에 내 할 일이 끝이 났다.



<우리 이야기>

오늘 우린 각자 다른 곳에서 서로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수없이 외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이행했다. 지하 식당에 가서 허기를 채우며 서로에게 일어난 일들을 시시콜콜 나눈다. 서로가 겪었을 차갑고 낯선 경험을 위로한다. 어색했던 이 과정이 익숙해지는 우리 모습이 웃프긴 하지만 오늘도 우린 서로를 토닥인다. 이 기억조차 웃으며 추억할 날이 오겠지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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