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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Apr 14. 2020

그런 날






마음이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었으면 하는 날








그런 날이 있다. 기대가 되지 않는 날. 그래서 아침이 되어도 눈을 뜨고 싶지 않은 날. 그런 날이면 늦잠이라는 핑계 아래 이불속에 최대한 숨어 있는다. 오늘이 그랬다. 하지만 새벽 5시 30분 알람이 울리자 바로 몸을 일으켰다. 조용히 침실에서 나와 서재로 들어가 책상 스탠드를 켜고 책상 앞에 앉는다. 요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오직 나만의 온기로 새벽의 고요함이 채워지는 시간. 보통은 이 새벽의 시작을 기도로 시작하는데 오늘은 눈을 감아도 어떤 기도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눈을 감은채 가만히 앉아 있다. 


내가 다니는 난임 병원은 채취하고 10일 후에 문자로 결과를 통보해준다. 수정이 되지 않았을 땐, 문자 연락은 없고 채취 후 첫 진료 때 선생님께 직접 결과를 듣게 된다. 2번째, 5번째 채취 때 하염없이 문자 연락을 기다리다가 선생님을 재미없게 만난 기억이 있어 그런지 미리 괴롭다. 오늘도 9시에 ‘수정 없음’이라는 한 마디를 선생님께 직접 듣기 위해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게 세상 귀찮다. 오늘 일정도 많은데 그냥 다음 달에 간다고 할까 하고 고민하다가 시술비 정산이 남아있음을 깨닫고 눈을 뜬다. 에효 다녀오자. 


나는 엄마가 진짜 되고 싶은 걸까. 어떤 반발심에 나오는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시험관 시술을 한참 진행하는 중에 문맥에 맞지 않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채취를 하고 열흘이 지나고 하루가 더 지나도 울리지 않는 핸드폰 문자 알람에 생각이 땅을 파기 시작해서 거기까지 갔나 보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난자 채취 실패 자락에서 하고 있으려니 내 자신이 참 구차해 보인다. 더 구차하게, 사실은 아이를 원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나 홀로 대답을 해본다. 그렇게 삐진 마음으로 내 진심에 대해 고민한다. 아까부터 조용하게 창문만 바라보고 있자 운전을 하던 남편이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다음에 또 하면 되니까 실망하지 말자고 병원 잘 다녀오자고 말을 건넨다. 응 그러자 라고 대답을 하며 남편 옆모습을 바라본다. 내가 직접 인정을 해주진 않는데, 솔직히 코가 참 이쁘게 생겼다. 조그만 얼굴에 곧게 뻗은 콧등이 참 매력적이다. 옅은 쌍꺼풀이 있는 큰 눈에 문신한 눈썹 (짙은 눈썹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만 거짓말은 못하..), 그리고 오종종한 입술. 남편을 닮은 딸이면 좋겠다. 우리 사이에 남편의 매력적인 모습을 닮은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문맥도 없이 세상 무거운 질문을 끌고 나와서는 잘 모르겠다는 무책임한 답을 내놓고선 남편 닮은 딸을 꿈꾼다. 


터벅터벅 병원 올라가는 발걸음은 왜 이리 무거운지. 오늘 진료의 좋은 점은 초음파는 없으니 금방 끝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있다는 것. 오래 대기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으로 기운을 좀 더 내본다. 예약시간에 맞춰왔으나 이미 대기실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오늘도 역시나 오래 걸리겠군 하고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고 눈을 감는데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른다. 선생님은 시술 중이시라 아직 진료실에 오시지도 않았고 내 대기번호는 한참 뒤이고 그리고 오늘 초음파를 하지도 않기에 부를 이유가 없었다. 놀라 진료실 앞으로 다가가니 나에게 동결배아 동의서를 건넨다.


“저 이번에 냉동 안 나온 거 아니에요?”

“아 이번에 연락이 늦어졌나 봐요. 2개 나왔어요”


마스크를 쓰고 울어본 적이 있는가. 지난 며칠간 꾹꾹 눌러왔던 감정이 터져 버렸다. '다음에 다시 하면 되지 뭐' 하고 나를 다독였지만 또 미뤄질 일정에 실망과 절망 사이에서 울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던 마음이 이제야 터졌다. 그런데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란다. 그렇게 바랐던 기적이 일어났다. 드디어 15개월 만에 2번째 이식 시도의 기회를 얻었다. 
 

그런 날이 있다. 나의 생각으로, 겪어보지 않은 오늘 내 하루를 미리 판단해 버리는 날. 내 세상만 어둡고 앞으로 나아갈 길 보이지 않아 다 포기하고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따뜻한 큰 사랑이 느껴지는 그런 날이 있다. 내가 지쳐 기도할 수 없을 때 다른 누군가의 기도로 내가 살아가는 힘을 얻는 그런 날 말이다. 나에겐 오늘이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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