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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Mar 18. 2020

설렘과 설레발 사이

설레발에 설레어도 

토닥토닥 괜찮아 

비록 유통기한 지난 테스트기이지만

한번 써보는 시간 



어렸을 때 살던 집이었다.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었는데 거실에는 성인 키보다 큰 창문이 있었다. 여름엔 방충망만 남겨두고 활짝 열어두면 마당 흙냄새를 싣고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거실에서 놀고 있는데 독수리 정도 되어 보이는 큰 새 두 마리가 방충망 앞으로 왔다. 머리를 쿵쿵 부딪치며 들어오려고 했다. 방충망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고 한 마리가 들어오고야 말았다. 너무 놀라 소리를 질러보니 꿈이었다. 너무 생생해서 한동안 가슴이 쿵쾅거렸다. 


며칠 전부터 가만히 있어도 멀미가 났다. 조금만 움직여도 핑 돌았다. 빈혈인 것 같기도 했는데 아침엔 어지러움 정도가 심했다. 그래도 뭐라도 먹으면 조금 나았기에 일어나자마자 항상 무언가를 입에 넣고 있었다. 잠이 계속 왔고, 찌뿌둥한 컨디션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예정된 생리는 5일째 늦어지고 있는 중이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뭔가 설렐만하지 않은가? 비록 이번 달은 배란을 쉬고 있는 약을 먹어서 임신의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안 그래도 조금만 틈을 보이면 가슴 깊은 곳에 꾹꾹 눌러둔 무한 긍정 세포들이 바로 튀어나와 온몸에 설렘을 유포하는데, 동물 나오는 꿈에 증세에 이건 뭐 틈 정도가 아니라 문이 열렸다. 아닐 거야 하면서 그동안 먹었던 약에 혹시 위험한 성분이 있는 건 아닌지 검색해본다. 임신이 당연히 아닐 텐데 뭐하러 테스터기를 사서 돈을 버리냐고 말하면서 임신 테스터기에 시선이 머문다. 환장할 노릇이다. 의학적으로 안될 타이밍에 혹시나 하는 설레발이 마음에 점점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쯤이면 내가 매우 긍정적이라기보다 무식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싶다. 머리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이 설레발에 맞춰해야 할 일을 생각해낸다. 다행히도 마음은 다르다. 속은 세월이 있어서 그런지 설렘과 설레발을 구분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안다. 결코 들뜨지는 않는다. 가장 냉정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머릿속 설레발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암튼 나는 머리와 행동이 따로 놀고 있는 현장을 또 지켜보고 있다. 


그동안 수많이 들었던 기적에 관련된 이야기 때문이라고 탓을 해본다. 주변에서 혹은 인터넷 카페에서 손쉽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이 되었어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심지어 어제 새벽 말씀엔 90살 할머니 사라도 아이를 낳았다. 이런 타인의 기적에 나의 희망을 덧붙여 보는 것이다. 채취 사이 쉬는 동안에는 자연임신을 시도해볼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 쉴 때  난소도 쉴 수 있도록 피임약을 처방해주신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혹시 제가 자연임신을 시도해 볼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너무 설레발치는 질문 같아서 물어보고도 민망했는데 선생님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시며 피임약 처방을 취소해 주셨다. 그 이후 채취와 채취 사이에 “어머! 시험관 하다가 자연임신이 되었어요!”라고 말하는 기적의 주인공을 꿈꿔보기도 했지만 그런 행운은 아직까진 없다. 그럴 일은 없다고 말하면서 기다리고 있고 아닐 거야 라고 말하고 맞기를 바라는 청개구리 같은 나의 태도는 헛물켜는 일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여실히 드러난다. 남편에겐 신경 안 쓰는 척 카이저소제 뺨치는 연기력을 뽐냈지만 실상은 온 신경이 내 난자의 움직임에 쏠려 있음을 이렇게 또 걸린다.   


오늘 아침 울렁이는 속을 붙잡고 테스터기를 해봤다. 결과는 한 줄. 또 설레발이었다. 증상들은 마지막 5일간 추가로 먹은 약의 부작용으로 보인다. 꿈은 그냥 개꿈? 태생이 조금만 신호를 받아도 금방 설레어하는데 이번에는 태몽 아우라를 뽐내는 동물 등장부터 어지럽고 메슥거리는 증상까지 속을 만 했다. 토닥토닥. 암튼 약을 먹고도 생리가 더 늦어지면 안 되기에 재빨리 간호사와 통화를 하고 예약을 잡는다. 잠시 스쳐간 설렘을 접고 병원 갈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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