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 추구의 플롯과 여행

파트 2

by Amy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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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하나는 한국에 엄마와 동생에게, 다른 하나는 내가 꾸린 터에... 이렇게 이중생활 한지도 몇 년째, 이제는 두 손으로도 다 꼽을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을 보냈다.

자폐진단을 받고 벌써 새해를 보낸 후, 그 해의 두 번째 달을 맞았다. 내가 무슨 일을 겪든 간에, 지구는 돌고, 일어날 일은 계속 일어난다. 내가 그 일들을 소화시키든 말든, 계속해서 나에게 새로운 숙제를 내주며 나에게 어떻게 하겠냐고 재촉한다.


자꾸만 화살이 나를 찌른다.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과 사건들도 소화시키며, 어른이 해야 할 것들도 다 해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간간이 찾아오는 이 '붕괴'를 어떻게든 막아내며 매일을 보낸다.

오늘도 10시, 내가 잘 시간만을 기다린다.



인정욕구, Recognition...

인정이라는 건 사람으로서 느끼는 다양한 욕구 중 거의 모두가 갖고 있는 보편적인 욕구 중 하나라고 한다.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확신, 그리고 그걸 확인하고자 함은, 어느 세대에서나, 어느 나라에서나, 어느 환경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인구도 많은데 왜 태어났니'

내가 초등학교 때 불렀던 '생일 축하합니다' 축가의 비꼬는 버전의 노래이다.


내 생일 때면, 나는 친구, 가족, 지인 그 모두에게 생일축하를 받고 싶고, 흔한 생파를 보내고 싶지만, 나 자신에게는 저런 노래를 불렀다.


나는 왜인지, 가족 내에서 태어나면 안됐을 존재,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존재 같았기 때문이다.

가족 내에서의 존재의 위치가 휘청거리니, 나는 친구에게서라도 찾아보고 싶었으나, 그게 성공했을 리 만무하다.


스스로 왕따, 은따임을 알아도, 나는 우정이라는, 친구라는 이름의 인정이 없으면 못 견뎠고, 나의 대한 평가는 오로지 타인에게서만 왔다.


모두 나에게 어떠한 '조건부' 사랑만을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 상황과 조건, 내가 어떤 괴물(?)이어도 나만을 바라봐주고, 사랑해 주는 그러한 극도로 이상적인 것만을 추구했다. 당연히 그런 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기적을 바라는 성냥팔이처럼 그렇게 마냥 기다렸다.


자애(自爱),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은 없었다.
타인의 나에 대한 평가와 감정 그리고 인정, 사랑이 흔들리면, 내가 흔들렸다.

그렇게 나를 붕괴시키는 건 쉬웠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이 퍼즐을 어떻게 어느 코너에서 맞춰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나의 나라, 내가 태어나고 자란 그곳에서 떠났다.


처음부터 언어부터 다시 다 시작해야 하지만, 내가 적응만 한다면, "열심히"만 한다면 다 꼬인 실타리 따위 버리고, 새로운 무언가를 내가 베이스부터 차근차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착각했다.


나라는 사람은 왜 이 모양인지 너무 알고 싶었다.

나의 인생에도 누군가 서술하는 작가가 있어서, 제삼자의 시선으로 나를 평가하고, 결말을 내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명한 학자, 작가, 성인, 기타 등등의 어른들이 말하는 "너의 인생은 너의 것", "네가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면, 그때마다 그렇게 목이 조였다, 짜증이 났다.


보통 자신의 주변일이나, 자신에 대한 일을 많이 서술하는 에세이를 많이 본다.

사람들이 픽션으로 지어내는 소설 말고, 정말 세상의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의 나날을 이야기하는 책에서는 무언가 답이 있을 것 같았다.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문장을 좍좍 줄 그어 내 상황에 빗대어 보고, 다시 봐서 아니다 싶으면 바로 패싱 했다. 그렇게 거르고 거르며, 나는 책 읽는 걸 노동으로 쳤다.


독서가 노동이 아니라, 취미 혹은 하고 싶은 어떤 것이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특히, 한국어로 된 책을 보는 게 귀한 현재, 한국어로 된 책의 독서가 더 여운을 준다.


애정하는 카페에서, 애정하는 작가의 에세이를 본 건, 내가 어느 극 중의 주인공이라서 프로그램대로 짜인 극을 건너가느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냥 우연인가.


여기 서점도 아닌, 카페에서, 내가 사가려고 하는 원두 팩 바로 옆에, 같이 팔리고 있는 그의 개인적인 여행기인 <여행의 이유>를 발견했다.


나의 수화물 초과무게 값이 전혀 아깝지 않은 책이다. (물론 책 때문이 아닐 수도...)



사람들이 가장 열광하는 인생의 21가지 플롯이 있는데, 그중에 “추구의 플롯”이 각광받는 이유를 말한다.


보통 내 인생의 ‘플롯’이라 함은 기승전결의 과정을 기본바탕으로 언제나 결말로 우리를 이끈다. 플롯이란 것을 통해 결말이 어떻게 될지를 모두가 궁금해한다.


우리가 여행을 가는 이유는 이런 플롯들을 보통과는 다른 상황과 장소에서의 불편함 속,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은 것을 얻은 탓에 미묘하게 돌아가는 행로에 몸을 싫기 위함이라고 했다. 기억을 되새기는 지금, 훨씬 미화되었지만, 과거 여행 중의 뱃멀미, 차멀미로 고생했던 기억, 그 속에 문득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작가 본인에게는 여행의 의미라고 하셨다.


일전의 나는, 캐주얼한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지금은 좀 오글거리지만, 나 자신을 '통통배에 몸 띄운 나그네'라고 칭했다. 정말 그렇게 어딘가에 닻도 내리지 않고, 내 생의 절반을 지금껏 해류에 따라 떠다녔기 때문이다.

학교가 거기여서, 집이 거기여서, 돈을 거기서 벌어서, 남자 친구가 거기 있어서, 등등 여러 이유를 만들어가며 나는 그냥 그렇게 떠다녔다.


해외에서 살고, 참 좋겠다라고 나를 띄워주는 이야기에, 나는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큰 고통인데... 라며 부정했다. 나중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아서, 그냥 애써 웃는 표정으로, 긍정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역마살'을 왜 가지고 있는지 왜 그걸 해명해야 하는지도 불편했지만......




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항상 캐릭터의 프로그램을 창작한다고 한다. 왜 이 주인공이 이렇게 많은 여행을 다니는지는, 주인공은 모르는 '프로그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여행을 그토록 다니는 이유는 여행 속에서 삶의 안정감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렇게 정의한다.

'삶의 안정감이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오는 것, 여행이란, 삶의 생생한 안정감'

이렇게 휘몰아치는 불안정함 속에서, 어떻게든 내 인생이 그래도 거기에 잔잔히 있다는 걸 인정하고, 현재까지도 유효하다는 걸 나도 어떻게든 알고 싶어, 이렇게 모국의 밖에 어떻게든 있으려는 걸까.




외할머니에게 다녀왔다.

나의 엄마조차도 본인의 트라우마와 힘듦으로 인해 십여 년을 못 봤던, 엄마의 엄마를 보러 인천에 갔다.


엄마의 몸이 너무 성치 못해, 택시를 타고 갔다 왔다.

엄마의 동생, 삼촌은 꽤나 오래전부터 이미,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셨다고 했다.


먼저 할머니의 수척해진 얼굴을 본 엄마는, 그 자리에서 "엄마..." 하며 우셨다. 수도 없이 불렀던 저 이름이 나의 엄마에게는 얼마나 무게감 있는 이름이었을지 그 자리에서 일그러지는 표정으로, 모두의 앞에서 우는 엄마를 보니 바로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보통 때에는 말을 잘하신다고 들었다. 음식을 씹어 넘기지 못해, '콧줄'이라는 걸 코에 넣어서 미음 같은 액체류 음식을 드신다고 했다.


내가 엄마와 동생과 같이 있는 그 한 시간여 동안, 할머니는 계속해서 나에게 방이 몇 개냐고 물으셨다. 의아한 얼굴로 간병인을 쳐다보니, 간병인분은 계속해서 병원을 퇴원해서 나가고 싶어 하시는데, 방이 1개 이상이면 본인이 들어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바로 3개 있으니, 꼭 나으셔서 어서 방쓰시러 오시라고 말씀드렸다. 상당히 경직된 근육의 얼굴로, 얼굴을 끄덕이시며, 나의 손을 꼭 쥐셨다.


눈물이 핑 돌기도 전에, 나는 머릿속에서 이미, 네가 너의 선택으로 할머니를 더 일찍이 보러 오지 않았으면서 울기는 왜 우냐는 핀잔을 하고, 또 들었다.


나는 나름대로, 할머니가 정신이 말짱하실 적, 우리를 밀어냈다는 사실과, 정말 엄마가 힘들 때 엄마와의 연락을 끊었던 사실, 생각보다 굉장히 복잡한 상황이라는, 그 모두를 말하며 열을 올리려고 해 봤지만, 결국 과거는 바꿀 수 없고, 그렇게 해봤자 이익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는 걸 알아, 그만두었다.




나와 엄마와 할머니, 이 모든 3세대의 여자들은 트라우마에 갇혀 본인에게 칼날을 장착해 고슴도치처럼 살기도 했고, 그 칼날에 오히려 본인이 심히 베어져, 상처를 입기도, 그리고 혼자 고립된 생활에 정신적인 외로움과 우울을 겪기도 했다.


우리 모두, 결국 기본적인 인정을 요구했을 뿐이다.


나는 엄마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관심, 엄마는 엄마의 엄마에게 인정과 믿음을 바랐고, 할머니는 남편에게서의 사랑과 관심, 자식들이 배불리 먹고 따스한 집에서 자라는 걸 바랐다. 서로가 서로를 봐야 할 상황에, 결국에는 다른 곳을 바라보느라 상처를 줬다는 게 교훈일까.


나의 트라우마를 살필 때는, 세상에 나만 이런가 혼자 인생은 불공평하다 외치며 우울해하다, 최근 엄마, 그리고 그녀의 엄마의 상처를 생각보다 가까이 보게 되었다. (운이 좋다고 할까...?)


결국, 우리는 모두 각기 이런저런 트라우마를 독처럼 지니고, 언젠가는 입에 넣고 터뜨려 버릴 청산가리처럼 그렇게 품고 있었다. 여차하면 그냥 그대로 자폭해 버릴 것처럼.


우리 엄마는 실수는 한 번에서 두 번까지는 실수라고 쳐줄 수 있어도, 세 번째는 바보 아니면 고의라고 했다. 나는 바보도 아니고, 이런 악하고 어두운 것을 고의로 경험할리는 없다. 외부의 것에서 모든 이유와 변명을 찾았던 지난 삼십 년을 뒤로하고(소용이 없었으니...) 이제는,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왜 인지를 보려고 한다.


딱 떨어지는 답도 없고, 누군가 나를 도와줄 스승도 없고, 결국은 나 혼자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 과정이다. 겁난다, 그리고 힘들다. 사는 게 힘들고, 생존하기 바빴던 두 윗세대를 본받아, 나는 최대한 사는 동안 생존을 위함을 탄탄히 하고, 먹고사는 것 때문에, 할 일을 하지 못해 나를 해했다는 '변명'을 하지 않겠다.


틱톡에서 유행하던,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이게 바로 '플롯'이라며, 이 플롯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는지 고통스러워도 궁금하다고 말하던 콘텐츠가 갑자기 생각났다.

김작가님이 발행했던 여행의 이유가 몇 년 전에 나왔어도, 추구의 플롯은 여전히 지금 세대에도 신기하게 유효하다. 불편한 상황, 예상밖의 사건사고, 낯선 곳 등.. 모두가 나에게는 끔찍한 것들이다. 일단 출발은 했고, 낯선 곳에서 힘들고 눈물 나는 상황에도 있고... 이제 '귀환'으로 갈 것이 아니라, 나는 지속적으로 내가 어떻게 반응하고 대응하는지 살펴볼 차례다.


간신히 간신히, 나의 붕괴와 절망을 막으면서, 나아가더라도,
아직 집에 가기는 멀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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