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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J Nov 29. 2022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 <上>

머릿속 터질 것 같은 묵은 감정을 토해내며


'멍 때리기 대회'라는 게 몇 년째 꾸준히 열리나 보다.

참가 요건 볼 것도 없이 자격 미달이다.

멍 때릴 줄을 모른다.


멍을 때려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 사실을 안 건 15년 전쯤이고,

명상할 때 방해가 된다.



가을이 짧아져 느낄 새도 없더니 올해 가을은 유난히 길었고 낙엽도 보기 싫었다.


말수가 없는 것에 비해서 속이 많이 시끄러운 편이다.

생각을 컬러 꿈꾸듯이 생생하게 한다.

어쩌면 소름 돋는 성향일 수도.

일어나지 않은 일도 마치 있음직한 일처럼 그려보곤 한다.


일뿐만 아니라 어떤 개념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면,

신기하게도 생각이 머릿속에서 활자로 정리된다.


십 대 후반,

정체성 혼란이 심하게 왔을 때 일 년 정도를 새벽 서너 시까지 깨어있으면서 글을 많이 썼더랬다.

미니홈피도 있었고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싸이월드에서 C-log라는 걸 운영해서 거기다 글을 썼다.

꼭 새벽 감성을 끌어오지 않았더라도 그때 글은 지금 다시 보면 귀중할 것 같다.

지금은 사라져 없지만.


그 이후에도 생각은 계속됐다.

가끔은 멍을 때려도 좋았을 시간에.

머릿속에 활자로 나열되는 그 생각들을 예전처럼 써 내려갔으면

최소한 감정 해소 효과라도 봤을 텐데,

글 몇 자 적는 게 뭐라고, 묵은 생각과 감정을 꺼내 차곡차곡 쌓을 용기가 없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몇 차례 옮기며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에 적응하려 하면서

내 감정을 회피해야 했던 것 같다.

나밖에 못 살펴주는 내 감정인데도.

그래야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 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 내면의 혼란 등

수많은 소용돌이로부터 생겨나는 감정 충돌의 스트레스를 감할 수 있으니까.


지금 또 핑계를 댄다.

감정을 마주하기 꺼려했고, 이불 뒤집어쓰고 눈 감으면 그만인 날들의 연속이었다고.

타자를 치는 게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기에 훨씬 편한데도

수첩에다 비밀스럽게 가끔 일기를 쓰는 정도로 그쳤다.

생각이고 감정이고 글이고 다 부질없다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렇게 다시 생각을 활자로 옮긴다.

여전히 생각은 많다. 속이 많이 시끄럽다.

그 이전 4년 간은 스스로 혼란 때문에, 또 최근 몇 달은 일련의 일을 겪으며

사실은 지금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아 주저하기를 반복하다 글을 써본다.



삶은 어떻게 시작되는 걸까? 죽음은 정말 끝을 의미하는 걸까?


인생의 모든 것을 재편해야 하는 큰 일을 겪으며

'삶'을 바라보는 내 마음가짐이 바뀌었고 또 한 가지 '죽음'이라는 개념도 추가됐다.


이런 다소 철학적인 얘기를 뜬금없이 할 곳이 마땅치 않다.

 "저는 왜 태어났을까요?"

 "저는 왜 살아야 할까요?"


힘 빠지는 물음 같아서 속으로 삼킨다.

그딴 철학은 모르겠고 내게는 살아내기에 가깝지만서도.

대신 알베르 카뮈의 책을 집어 들어본다.

궁금증이 조금은 풀릴까 해서.


그리고 우연히 내 궁금증에 각주 하나를 더해줄 만한 강연을 듣게 됐다.

<下> 편에서 강연 내용을 정리해보려 한다.



구름 너머에 평화의 세상이 존재하기를.

♬ Clouds - Before You Ex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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