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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arling Feb 01. 2019

숲 속 유치원의 부모가 된다는 것의 의미

#003 세 번째 이야기

모든 부모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봉사 참여를 하며, 자신의 자식만을 위한 게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위해 존재한다. 


여자 아이든 남자 아이든, 세상의 여러 모순에 당당히 맞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단한 갑옷이 필요하다. 여기에 찬란한 검과 방패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든든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부모 자체가 먼저 이 갑옷이 왜 필요 한지, 적의 정체는 무엇인지, 어떤 전략이 필요한지, 전쟁이 필연적으로 필요한 건지, 평화 협정은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떤 조건들이 달릴 수 있을지 알고 준비해야 한다.


한 달에 한번 이상 있는 숲 속 유치원 부모 회의


그냥 마냥 자연이 아이에게 좋으니까 숲 속 유치원에 보낸다? "보낸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 또한 좀 불편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함께 이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니까. 이탈리아에서도 요 몇 년간 숲 속 유치원이라는 새로운 교육 철학과 교육 개념, 시설들이 덴마크, 핀란드, 독일 등의 북유럽에서부터 내려와 번지기 시작하고 있다. 숲 속 유치원은 1950년 중반 덴마크에서 부모 주도 형태로 만들어져,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스스로 체험하고 탐구하며 독립된 개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준다.


많은 이들이 숲 속 유치원을 열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 교육 철학부터 실용적, 경제적 측면까지 모두 알기 위해 여러 워크숍을 찾는다. 많은 그룹의 엄마들이나 교육자들이 시도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룹들이 생겨났다 없어지는 것을 본다. 금전적인 문제, 교육자와 부모들 사이의 불화 등등의 원인도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부모들의 공통된 교육 개념 부재에 있다고 감히 나는 말한다. 10 가족 이상의 가족들이 한 뜻으로 함께 나간다는 건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다. 서로의 성격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기에 모두가 가족이나 친구가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를 하나로 합쳐 엮어주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같은 교육관을 가지고 함께 공부하며 아이들과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숲 교육 워크숍 현장으로, 여러 외부 교육자들이 참석했고, 우리 숲 속 유치원의 부모들은 하루에 6시간씩 이어지 3-5번에 이어지는 이 워크숍을 의무적으로 듣는다. 


아이들을 독립된 계체로 존중하고, 스스로 결정 내릴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아무리 추운 겨울 날씨에도 아이가 덥다며 재킷을 벗는다는 건, 정말로 아이가 덥다는 것이다.(어떤 아이들은 반팔로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감기에 걸리진 않는다.) 12월에 아이가 신발도 양말도 없이 맨발로 숲을 뛰어다닐 때 부모들은 이를 바라보며 아무 말 안 할 수 있는 내공이 있어야 한다. 이곳 숲 속 유치원의 아이들은 오늘 무엇을 하고 놀 것인지, 언제 간식과 점심을 먹을 것인지, 어느 숲으로 갈 것인지, 다시 캠프 베이스로 돌아간다면 언제 돌아갈 것인지를 스스로 정한다. 모든 아이들의 뜻이 안 모여질 때면 2그룹으로 나누어서 갈 곳을 정하기도 하고, 숲 속 유치원에 아침에 오자마자 간식이 아닌 도시락부터 꺼내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유치원이 끝날 시간 때까지 아무것도 안 먹고 뛰어노는 아이들도 있다. 나의 첫째 아들은 처음 1년 동안은 친구들과 노느라 점심은 집에 돌아와서나 돌아가는 차 안에서나 먹곤 했다. 이 아이는  친구들을 보면 위가 그냥 닫히는 것만 같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의 둘째 딸은 배가 차지 않고서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아침을 배부르게 먹고 가도 꼭 가자마자 점심 도시락부터 찾아서 먹고 시작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스스로 정해서 할 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뭔지를 자연스럽게 알아간다. 그렇기에, 섣불리 먼저 나서서 의견을 이야기하기보다, 되려 질문을 돌려 어떻게 생각하는지 스스로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끄집어낼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키우고, 세상을 여과되지 않은 아이의 눈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개울물이 꽁꽁 얼은 추운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온 Francesco(왼쪽 사진), 칼싸움을 하고 있는 웃통벗은 나의 둘째 딸 (오른쪽 사진)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에 대한 언어적 차별에서부터 시작되는 모든 모순을 부모부터 먼저 공부하고 배워서 적절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면, 요즈음은 모든 장난감들이나 하물며 책까지도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를 위한 것으로 구분되어 있다. 특히 여자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들이나 책, 옷을 고를 때 고려하는 색상들을 보면, 이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과 위치가 너무도 빤히 보여서 미간에 주름이 안 생길 수가 없다. 아들과 딸 모두를 키우고 있는 엄마로서,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 간의 차이를 인정 안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 아이가 칼싸움이나 전쟁놀이, 공룡, 스파이더맨이나 베트맨을 안 좋아할 거라고 미리 단정 지어 버리고 차단해 버리진 않았는지. 또한 남자아이라고 해서 소꿉놀이 라던가, 인형놀이, 캠핑 놀이, 치마 입기, 화장이나 변장 하기 등등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지는 않았는지 우리 부모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또한, 아이 하나하나의 고유성과 다양성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모든 아이들이 자기 자신만의 시간대로 성장해 나간다. 어떤 아이는 먼저 걸음마를 시작하기도 하고, 먼저 말을 시작하기도 하며, 전혀 말할 기미를 안보이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언제나 말을 했던 마냥 말을 쏟아내기도 한다. 어떤 아이는 전혀 숫자나 글자에 관심이 없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아주 어릴 적에 이미 숫자를 100까지 쉽게 알아버리기도 한다. 어떤 아이는 몸을 움직여야 직성이 플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한자리에서 꿈쩍도 안 하고 잘도 붙어 있기도 하다. 음악적 재능이나 미술적 재능, 춤에 대한 재능이 이미 보이는 아이가 있기도 하고, 뭐든 만들어내는 일에 흥미를 보이는 아이도 있다. 지극히 과학적인 아이가 있는가 하면, 상상의 세계 속에서 사는 아이도 있다. 다른 이들과의 감정 교류나 감정 이입에 뛰어난 아이가 있기도 하고, 전혀 무심한 아이도 있다. 이렇게 얼굴도, 성격도, 머리 색깔도, 피부 색깔도 모두 다른 이 아이들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않고 아이 고유의 방식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인정해주자. 


Ariana가 화가 나서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을 때, 이 아이와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대화하기 위해 나 또한 드러누웠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이러한 다양성은 아이가 회가 났을 때에도 아이들마다 화를 가라앉히는 방법이 각기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다. 화가 풀릴 때까지 소리를 지르거나 울어야 하는 아이라면, 재빨리 적당한 장소로 아이를 데려가 주어야 한다. 화가 났을 때 혼자 있어야 하는 아이라면, 화를 풀게 하기 위해서 옆에서 말을 걸기보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아이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주며, 진정된 뒤 어떻게 대화를 시작할지를 생각해보는 게 더 현명할 것이다. 물론 부모도 사람인지라, 화가 나서 소리 지르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안 해봤다면 사람이 아니다.) 먼저 거센 감정의 소용돌이가 좀 지나갈 수 있도록 자신을 먼저 추스르고 난 다음, 내 마음이 이러이러했었다고 진솔하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의할 점은, 절대 아이가 그 말로 인해 내 잘못이란 죄책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진솔하게 털어놓는 것이라는 걸 인식할 수 있게 단어 선택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또한 여러 질문식 답 대화는 아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스스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화가 가라앉을 시간을 갖게 된다.


부러진 나무를 다리로 이용해서 개울물을 건너고 있는 Davide


또한, 아이들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실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에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 이 위험을 감수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의 판단 또한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할 수 있도록 우리는 옆에서 도와줄 수 있다. 우리 어릴 적을 생각해 보아라. 어떠했었는지.... 얼마나 많이 어른들 몰래 온갖 모험들과 위험한 장난들을 했었는지... 불장난에, 담 위에서 뛰어다니고, 대문 위나 지붕 위에 올라가고, 나무 위를 올랐다니며 이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고,,,,, 수백 번도 더 많이 넘어졌고,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가서 병원에 간 적도 참 많았었다. 그런 우리들이 이젠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온실 속에 가두어 자라게 한다면, 우리의 아이들은 새로운 도전을 할 기회를 뿌리부터 우리가 앗아가는 것일 것이다. 한 예로, 첫째 아들이 만 3살 반이었을 무렵, 숲 속 유치원에서 놀던 중 (진짜 숲을 의미한다) 어느 날이었다. 이 숲에는 개울 위로 나무그루가 부러져서 다리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그 다리 나무는 높이가 약 1미터 반 정도 높이에 있었다. 아들보다 거의 3살이 많던 한 친구가 이 나무를 보더니, 올라가서 다른 쪽 개울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이를 보더니, 나의 아들과 몇몇 아이들이 이와 같이 하기 위해 나무에 달려들었다. 이때 자원으로 온 부모는 이 새로운 모험이 줄 수 있는 위험성 또한 재빨리 감지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천천히 혼자 갈 수 있도록 말로 도와주고, 혹여나 떨어질 경우에 잡아 줄 수 있게 개울 물 다리 아래서 대기할 뿐이었다. 곁에서 도와주는 부모도, 조금 먼 발에서 이를 바라보던 부모들도 아이들을 믿고 기다려 주었다. 이렇게 해서 몇몇은 그 다리를 건너겠다는 목표를 달성한 아이들도 있었고, 그중에는 시도를 하려다 하지 않기로 스스로 결정한 아이도 있었다. 이때 시도를 하지 않은 아이는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는 다른 방식을 생각해내 친구들이 건너간 개울 건너편으로 갔었다. 이렇게 우리가 믿고, 침묵하고, 기다릴 때, 아이들은 커간다.   


부모가 바뀌어야지 세상이 바뀌고, 우리 아이들이 살았으면 하는 미래의 세상이 바뀔 수 있다.  우리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아이들을 믿고, 스스로 성장해 나가도록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 이후, 자주적이고 하나의 독립체로써 자신의 삶을 책임져서 일궈나가는 건 각자 아이들의 몫인 것이다. 아이들이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세상이 정해 놓은 잣대나 왜곡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도록 도와주는 게 우리의 몫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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