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아홉 번째 이야기
몇 년 전 우리는 거의 15년이 된 중고 그린 밴을 스페인에서 구입했었다. 우리가 이 밴을 사면서 우리의 삶의 스타일도 완전히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밴은 나이는 좀 들었어도, 전 주인이 꽤 간수를 잘 해서 건실했고, 우리는 이 밴을 변신 로봇 자동차 트란스 포머처럼 여러 가지로 변신시켜서 애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6개월 이상 지내던 곳은 유럽에서도 가장 남부인, 스페인 남부 바닷가인 Cadiz 근처와 포르투갈 남부 바닷가인 Armacao de pera이므로 바닷가에서 지내며 캠핑카처럼 사용하곤 한다. 그다음 날이 남편이 쉬는 날이면, 언제나 남편 일이 끝나자마자 밤에 미리 트란스 포머 그린 밴의 의자들을 90도로 젖혀 침대처럼 준비해 놓고 곤히 잠자고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달려간다. 그렇게 캄캄한 밤에 도착하면 전봇대도 없는, 불빛 하나도 비치지 않는 하늘에서는 비처럼 별들이 쏟아져 내리곤 한다. 이를 나의 이탈리안 요리사 남편과 함께 말없이 바라본다. 이런 압도적인 광경에선 어떤 말도 불필요하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커튼을 살짝 재끼면 창문 너머로는 숨 막히게 압도하는 바다의 절경이 한눈에 보이고, 이는 어떤 특급 호텔도 부럽지 않다. 이렇게 고요하고 평온한 아침햇살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면,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아침 인사와 함께 서로를 부둥켜안고 뽀뽀 세례를 날린 후,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나면, 우리 트란스 포머 그린 벤은 캠핑카처럼 작은 테이블을 뱉어내어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이탈리안 요리사 아빠가 준비해주는 환상적인 요리들을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으로도 변신한다. 일단, 아침에는 간단하게 오렌지 주스로 시작을 한다. 보통, 스페인의 오렌지는 1월에서부터 3월까지가 적기이고, 그 이후에는 쓰고 신맛이 난다. 지리상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바로 옆에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한하게도 포르투갈의 오렌지는 일 년 내내 달콤한 맛을 유지한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 보면 직접 농민들이 키워낸 오렌지를 길에 깔아놓고 파는데, 커다랗게 한 자루를(약 10kg) 사면 5유로라는 정말 착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갓 짜낸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약간의 시리얼을 먹거나,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간단히 먹고 나면, 바로 바닷가로 직행이다! 이렇게 캠핑을 할 때면 점심이나 저녁 한 끼는 레스토랑에서 먹고, 다른 한 끼는 이탈리안 요리사 남편이 마법을 부리는 시간이 온다. (실은, 남편이 세끼 다 하는 게 귀찮을까 봐 그렇지, 보통 레스토랑에서보다 남편 밥이 훨씬 더 맛있다.) 가끔 우리가 잠을 자기 위해 자리 잡는 곳 중 한 곳에는 숯불을 피울 수 있게 만들어져 있어서 그날 시장에서 사 온 생선이나 새우를 구워서 먹기도 한다. 이렇게 배불리 먹고 나면 모든 피곤이 몰려오고 하늘에 가득 찬 별들을 함께 바라보고, 함께 책을 읽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뛰어놀고도 아직도 모자란 지, 나의 첫째 아들은 우리가 읽어주는 책량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침대에 가서도 형광등으로 비춰가며 책을 실컷 보고서야 불을 끄고 잠을 청한다.
가끔 자동차로 장시간 이동할 때나, 자동차 안에서 기다려야 할 일이 생길 때에도 우리의 트란스 포머 그린 밴은 여러 책들을 항상 비치해두어 움직이는 도서관으로도 변신한다. 그럼으로써, 아이들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책을 마음껏 볼 수 있다.
장거리 여행을 할 때면 음악을 틀면 여느 콘서트장에서처럼 소리 지르며 노래 부르고 아이들과 함께 몸을 신나게 흔들기도 한다. 각자가 원하는 음악이 달라 가끔 트란스 포머 그린 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나 전쟁터가 돼버리기도 한다. 또한, 음악만으로 버티기 힘들 정도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오디오북 이야기를 틀어 모두가 함께 이야기를 들으며 간다.
게다가 여태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를 돌아가며 살아갔기에, 짐 봇다리를 옮겨주는 짐차 역할도 톡톡히 해주었다. 조그만 자동차였을 때에는 그에 맞게 꽉꽉 야무지게 채웠다면, 자동차가 커지니 가지고 다니는 짐 또한 자연스럽게 늘어나버렸었다. 지난번 이야기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기엔 나는 아직 너무도 부족한 사람이다.
어쨌든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우리의 트란스 포머 그린 밴의 자유 변신 덕분에 우리 가족의 삶은 다채롭고 다양한 맛이 나는 와인처럼 깊은 맛과 향이 더해지고 있다. 할 말을 잃을 만치 멋진 광경들을 함께 바라보고 싶은 사람들. 맛난 음식을 맛볼 때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는 사람들. 감미로운 음악이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갈 때 나처럼 같은 감성으로 느꼈으면 좋겠는 사람들. 귀가 터질 듯이 울거나 아수라장을 만들어서 삶을 범벅으로 만들어놓아도 내 품에서 평온하게 천사처럼 잠이 드는 사람들. 길고 긴 지루한 삶의 여정 속에서도 오아시스처럼 나의 마른 목을 축여주는 사람들. 이것이 가족이 아닐까? 이런 내 가족과 오늘도 우리는 트란스 포머 그린 밴에 몸을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