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maDarling Jun 28. 2019

순수했다는 건 변명에 불과해.

#013 열세 번째 이야기

살아가면서 인생의 멘토를 만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더욱이 어릴 적에는 그렇게도 커다랗게 보이던 부모님들이나 스승들이 내가 성인이 되어 바라보았을 때, 그들이 더 이상 슈퍼 영웅들이 아님을 깨닫는 건 그닥 반갑지 않다.  


나의 경우에 있어서는, 예술 창작 작업 쪽에 있어서는 연애운과는 달리 언제나 참 운이 좋았었던 것 같다. 내가 다니던 대학 시절에는 대학 다니던 학생 신분으로 외부 전시를 한다는 건 하늘에 별따기처럼 있을 수 없던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파리의 퐁피두 센터의 한국의 여성으로선 최초로 큐레이터 자리에 올라가신 분의 눈에 띄어서 외부 전시들에 참여하기 시작했었다. 너무 순수한 마음으로 겂없이 들어간 미술계는 내가 상상했던 것만치 멋지기보다 치졸하고 비열하기도 했었다. 이에 치를 떨고 1년간 학교에서 조용히 작업을 하다가, 다시금 활동하기 위해서 어플리케이션을 날렸고, 다시금 전시들을 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좌충우돌하던 상처투성이였던 10대, 20대에도 나에겐 운 좋게도 나의 예술적 멘토링을 해주시던 분이 계셨는데, 이분은 예고 시절 한국 종합예술학교를 준비하면서 나에게 입시미술이 아닌, 진정한 예술의 세계를 열어주셨던 분이었다. 그분을 통해서 작가 정신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었고, 예술가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셨었다. 


2002년 첫 외부 전시 때 걸었던 작업과 그 이후로 K-옥션에서의 전시 섭외로 아스케키 시리즈 작업 전시했던 때


그분의 수업시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대학교에서나 배울 것들을 도서관에 처 박혀서 세계에 널린 날고기는 작가들을 공부하고, 자료들을 수집하고, 작업에 임했었다. 이 분 수업에서의 자기 작업의 프레젠테이션 시간은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도마 위의 생선마냥 한 작업이 도마 위에 올라왔을 때 반응은 딱 2가지이다. 아무런 질문이 없거나 질문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아무런 질문이 없다는 것은 2가지로 해설할 수가 있는데, 첫 번째로는 할 말이 없게 너무 작업이 좋다는 것과 두 번째로는 아무런 말을 할 가치가 없는, 지루하기 짝이 없거나 흥미가 없는 작업이란 것이다. 질문이 쏟아져 나오는 반응 또한 2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는데, 이는 작업이 너무 재미있어서 자꾸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생긴다는 것과, 반대로, 주어진 과제에 전혀 안 맞게 어처구니없이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할 때 쏟아져 나오는 칼날 같은 질문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수업을 통해서, 나의 작업을 프레젠테이션 할 때에는 최소한 나의 작업에 내가 책임 질 수가 있어야지만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기도 했다. 또한 이렇게 동료들이 쏟아내는 냉철하고도 핵심을 뚫는 칼날처럼 실랄한 질문들이 비수처럼 쏟아질 때, 이 분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도록 뒤로 물러나 계시면서 논쟁이 너무 핵심을 벗어난다 싶을 때에만 개입을 하셨다. 그 혹독한 트레이닝 덕분에, 대학시절 가장 혹독하고 악명 놓은 교수님의 수업에 나는 이미 만반의 갑웃을 다 입고 들어갈 수 있었다. 


이분이 미국으로 떠나시고 8년 만에 돌아오셔서 열게 된 귀국 전 준비를 도와드리러 대학로의 한 갤러리를 찾아가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분이 안 계시던 8년 동안에도 간간히 작가로서 방황할 때면 언제나 메일로 나를 다독이셨고, 내 생애 첫 외부 전시에 대한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드렸었고, 언제나 내 앞의 예술가 선배로써 걸어가시던 분이었었다. 그런 이분을 성인이 되어서 다시 뵙게 되었을 때, 혹여라도 이분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초라하시거나 작아 보이면 어떡하나,,,,실망해 버리면 어떻게 하지? 하는 약간의 걱정과 그분을 다시금 뵙게 된다는 설렘이 나의 발자국에 뒤섞여 있었다. 그렇게 8년 만에 다시 뵙게 된 그분은 언제나처럼 내 앞에서 걸어가고 계셨고, 언제나 내가 참 부족하구나, 공부해야겠구나,,, 하고 느끼게끔 만드셨다. 내 앞에서 당당하게 커다란 그 모습 그대로 작가로서 걸어가시는, 계속해서 존경할 수 있게 해 주신 그분이 눈물 나게 고마웠었다. 


그리고 광주 비엔날레의 30대 초대 작가로 그분의 작품을 다시 보러 나는 광주 가는 기차표를 끊었었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그분의 작업을 보기 위해 오는 학생들은 그분이 갖 가르치시기 시작하신 대학교의 몇몇 학생들과 옛 제자인 나, 그리고 그분의 예술가 동료 지인분들 정도였다. 서울에서부터 그분의 작업을 보러 광주까지 왔다는 옛 제자이자 이미 20대  후반을 달려가는 나를 약간은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그분의 예술가 동료들의 시선을 저녁 술자리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너무 순진했던 나는 내가 신처럼 동경하는, 감히 어떻게 해볼 수 있다고 꿈에도 꿔본 적 없는 그분을, 그분의 동료들께서 신전의 자리에서 끄집어 내리려는 것 같아서 신경이 거슬렸으나, 내 마음이 진심이고 흑심이 없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분에겐 그분만큼이나 멋진 예술가이자,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가 계셨고, 그분을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알기에, 단 한 번의 흑심도 품어본 적이 없었다. 비록, 그분이 먼저 한국에 나오시고, 그분의 아내는 예술활동을 위해 뉴욕에 남기로 했다고 하지만, 매일 저녁 존댓말로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로 통화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 정말 멋지게 사랑하시는구나. 나도 저렇게 서로가 존중하면서 힘이 되는 인생의 동반자를 언젠간 만나고 싶다고 진심으로 부러워했었다. 그렇게 그냥 순수한 마음 하나만 있으면, 뭐든 다 받아 주실 거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걸까? 몸은 이미 성인이었지만, 마음만은 그저 16살의 그분의 제자였던 나는,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었었다. 허름한 술집에서 소주가 한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잔이 되어가다 돌아가는 버스를 5분 차로 놓쳐버리고 말은 것이다! 그리고 밤 12시가 넘도록 함께했던 모든 멤버들을 포함해서 결국 그분까지 나를 의심했었던 것 같았다. 진짜 왕복 기차표를 샀느냐고,,,,그렇게 꾸짖듯이 묻는 그분께 나의 설명은 우왕좌왕에다가 입 밖으로 나오는 모든 말들이 내가 들어도 그냥 무슨 변명 같이만 들렸었다. 그리고 그날이 그분을 뵌 마지막 날이었다. 성격만큼 곧기만 하신 그분은 나와의 인연을 칼 같이 끊어 버리셨다. 그냥 순수하게 그분을 존경하고 좋아하던 열정에 휩싸여, 나는 내 감정에만 솔직했었던 것 같다. 그분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해선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었으니,,,,그런  경솔한 행동이 그분에게 누를 끼치고, 결국 나는 나의 예술적 인생의 멘토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I LOVE SWEETLY GUN, 2005, 274 X 234cm


약 9년 전, 처음으로 세비야 Sevilla에서 플라멩코 페르시아나 프로젝트 작업("플라멩코에 미쳤던 여자"편을 참고하세요. https://brunch.co.kr/@anachoi/1)을 시작해서 완성되는 족족 뜨리 아나 Triana의 한 건물의 창들에 하나씩 걸리기 시작했을 때, 그분에게 다시금 메일을 보내고 싶었으나, 차마 용기가 생기지 않았었다. 그분의 어리석고 어리광쟁이였던 제자가 한국 땅을 떠나서 스페인 Spain의 세비야 Sevilla 거리 한복판에 작업들을 걸기 시작했다고,,,,나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플라멩코 박물관 Museo del Flamenco, Cristina Hoyos, Sevilla의 얼굴 마담이라고 할 수 있는 대형 쇼윈도 전체 3면에 전시


살아가면서 어쩔 때에는 엎어져버린 물처럼 다시는 주어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흘러가버린 시간과 세월이 그렇고, 생각 없이 뱉어버린 말실수들이 그렇고, 이미 지나가버린 사랑이 그렇다. 상대방을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나의 감정에만 충실하고 이기적이었던 그때의 나. 다시는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때 그 밤을. 그렇게 후회되는 기억들 모두 모두 흘려보내야 한다. 그리고,,,,삶은 계속 되어진다. 

Mamma, 엄마.... 천에 바느질 드로잉 실험 작업중,2019


매거진의 이전글 너는 내 반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