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 열네 번째 이야기
1년에 6개월이나 남편이 쉬건만(플라멩코에 미쳤던 여자 편을 참고 하시길.https://brunch.co.kr/@anachoi/1), 남들이 그리도 그리고 그리는 장기 여행은 왜 하지 않느냐고, 내게도 내 남편에게도 다그치듯 물어보던 때가 있었다. 우리 둘이었다면 세상 어디든 그냥 훌쩍 떠났을 텐데...... (여기서 얘기하는 장기여행이라 함은 최소 2-3달 이상을 의미한다. 1달 정도의 여행은 언제나 해오고 있으므로) 하긴, 나보다도 더 세상 여기저기를 잘 쏘다니던 남편이라고 손, 발이 안 근지러웠을까.... 처음엔 둘째를 임신해서 준비하던 남미 여행은 접혔고, 나중에는 숲 속 유치원이라는 커뮤니티가 주는 매력으로 꽤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렀다. 하지만 역시 남편은 2달 이상으로 이어지는 장기여행에 대해 아직도 많은 두려움과 부담을 가지고 있다. 나는 성격상 그냥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성격인데 비해, 남편은 나의 그런 성격 때문에 몰려올 다음 사태까지 생각해야 하는 책임남이다. 나는 구름 위를 걷고, 내 남편은 그 구름 밑에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염려한다.
하지만 언젠가 남편이 얘기했다.
내겐 꼭 어딘가를 떠나야지만 한다는 강박관념은 없어. 일 안 하고 하루하루 너랑 우리 아이들이랑 지낼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내겐 휴가야.
사고로 내가 발을 다쳐 모든 가족들이 발 묶여있던 때에 남편이 내게 건넨 말이다. 너랑 함께 하는 하루하루가 내겐 축제이고 휴가라는 그의 말에, 나의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첫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1년 동안에도 5-6개국의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여행하고, 살아가던 여행족 가족에게 건넨 그의 말은 정말 강한 의미를 내포했다. 왜 그렇게 나는 여행에 목을 매며 살아갔었던 것일까? 일상의 하루하루를 값지고 고맙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일진대,,,,아님, 맹목적으로 무조건 여행이란 자그마치 남들이 쉽게 할 수 없는 몇 개월에 걸쳐서 해야지 좀 폼이 나는 것이라고, 그렇게 속으로 자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계속 변화 없이 이어지는 지겨운 일상이라면 "일탈"이라는 의미에서 여행이란 게 주는 의미가 꽤 클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여름에 스페인 남부 바닷가에서 다치게 된 다리로 1달 동안은 꼼짝도 없이 침대 신세로 지내다가 드디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는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그렇게 고되고 언제 끝날지 끝이 보이지 않는 치료 과정과 일주일에 2번씩 가야 하는 병원 일정은 쉽사리 어딘가를 떠날 계획을 잡기도 꽤 어려웠고,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던 나로선 움직이는 모든 게 남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었다. 또한, 하루, 일주일, 이주일, 한 달, 6주,,,,이렇게 언제 끝날지 모를 치료 과정은 우리 가족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었다. 나의 슈퍼맨 남편의 하루는 지겹도록 고되고 지루할 수밖에 없는 일들의 반복이었다. 율이를 숲 속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장보고, 요리하고, 청소하고, 아이들과 나와 함께 산책을 나가고,,,,등등,,, 그가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 가족들은 그냥 움직이지 않는 고인 물과도 같았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지하수로를 돌고도는 기분이었다. 그때, 나의 슈퍼맨 남편은 좀처럼 여름에는 이탈리아에 돌아올 수 없는 우리 가족의 스케줄에서 예외적이 된 올해를 제대로 보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죽기 전에 한 번쯤은 꼭 봐야 하는, 여름에 가야 제 맛인 "돌로미테 Dolomitte"를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2박 3일의 여행을 감행하였다.
돌로미테 Dolomitte는 이탈리아의 북쪽의 알프스 산맥으로 오스트리아와 연결되어 있다. 가을만 조금 넘어가도 눈이 쌓이고 어떤 길들은 눈으로 인해 봉쇄되곤 한다고 한다. 이런 돌로미테 Dolomitte는 산봉우리가 돌들로 이루어져, 절벽에서 쏟아서 나온 듯이 올라와져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 곳을 가보고 나서야 왜 죽기 전에는 꼭 한번쯤은 가서 봐야 하는 곳인지 이해가 갔다. 아직 휠체어 신세인 나와 5개월 된 둘째 가이아와 만 3살 반이 된 철떡 구니 첫째 아들 율이를 데리고 이 엄청난 여행을 감행한 나의 슈퍼맨 남편은, 말 그대로 슈퍼맨 만치의 힘이 절실히 필요했었다. 단순히 산책을 하기 위해서도, 내가 둘째인 가이아를 안고 휠체어에 타고, 이를 부러워하는 철떡 구니 첫째 아들까지 내 다른쪽 무릎 위에 올려져서 온 가족들을 휠체어에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다녀야 했었다. 초자연이 주는 위로의 위력은 대단했다. 우리는 말없이 매일같이 떴다가 지는 해가 빨갛게 온 세상을 물들이는 것을 바라보았고, 그 속에서 너무도 속으로 끙끙대며 긴장의 끈을 놓치 못하던 정신줄을 좀 풀어놓았다. 그리고 조금 신세를 져도 너무 "미안해" 하지 말자고,,, 우리 사이에 "고맙다"는 얘기는 그만하라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직도 얼마 동안이나 계속해서 치료를 해나가야 할지 알 수 없는 기나긴 치료과정을 다시 한번 정면으로 마주할 힘을 얻어서 왔다.
그렇게 나의 슈퍼맨 남편이 내게 힘을 주는 여행과 함께 이렇게 1달을 우리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보낸 뒤, 3주 동안 포르투갈의 여름 레스토랑을 마무리하러 가야 할 순간이 왔었다. 남편은 가기 전에 그를 대신해서 도와줄 사람을 구해놓고, 친구들과 가족들을 모두 동원해서 아이 둘과 남겨질 나를 힘들지 않게끔 사전에 모든 준비를 해놓았다.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서 간 나의 슈퍼맨에게서 걸려온 전화 저편의 목소리는 너무도 안 좋았다. 아픈 아내와 철없는 두 아이를 생각하며, 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인지,,,,하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생각한다고,,,,너무 보고 싶고 그립다고,,,,이 말에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이도 저도 생각지 않고 포르투갈로 가는 비행기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돈이 얼마나 드는지가 중요치도 않았었다. (분명 잠깐 정신이 어디론가 나갔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사고로 인해 꽤 많은 돈들이 그냥 손가락 사이로 풀풀이 나가 버렸는데 말이다.) 아픈 다리로 아이 둘을 데리고 갈 수 있는지 사전에 항공사에 묻지도 않고, 나는 비행기표를 저질러 버렸다. (이렇게 앞, 뒤 제지 않는 나의 무모함에 나의 슈퍼맨 남편은 경악하곤 한다. 그냥 말도 못 하냐고!!! 어떻게 그렇게 막무가내로 일을 저지르냐고!!!!) 그렇게 해서 미리 비행기표를 저지르고, (절대 환불 안되기로 유명한 유럽 저가 항공사인 RyanAir) 항공사 본부에 몇 차례 전화한 끝에 어렵게 비행 수락을 얻어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목발을 짚고, 아기띠에 7개월 된 둘째 딸 가이아를 업고, 만 3세하고 8개월 된 첫째 아들 율이를 데리고 나의 우울증 걸린 슈퍼맨 남편을 구하러 포르투갈로 날아갔었다. 포르투갈의 남부 바닷가는 여전히 눈부시고 파아란 하늘과 녹푸른 바다가 우리를 반기었다. 바뀐 게 있다면 내 왼쪽 다리에 많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고, 내 첫째 아들의 손을 잡고 걸을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참 사소한 건데도, 그게 참 많이 서러웠다.) 그렇게 잔잔한 바다를 슈퍼맨 남편과 손을 맞잡고 말없이 바라보았다.
사고가 나고서 정확히 6개월이 된 12월 10일, 병원에서 드디어 치료가 끝났다고 했다. 이제 정기적으로 수술로 인한 외상치료는 받을 필요가 없이, 드디어 처음으로 발을 땅에 내려놓을 수가 있게 되었다. 물론, 이제부터 재활 운동이란 또 길고 긴 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쨌든, 드디어 병원에서 받는 정기 치료가 끝난 것이다. 이 소식을 받자마자 우리는 항공 편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길지 않은 비행시간과 자동차로 편하게 다닐 수 있는, 아직 12월이지만 따스한 햇살이 우리를 기디리는 곳, 시칠리아 Sicilia로 2주간 떠나기로 결정했다. 남편이 일하지 않는 겨울을 포함한 6개월을 지내기에 밀라노는 너무 춥고, 우중충했었다. 그래서 스페인의 남부인 세비야처럼 따뜻할 수 있는 이탈리아 남부를 바라보기 시작했었다. 그러므로, 시칠라아Sicilia의 여행은 단순히 관광을 위한 여행이라기보다, 6개월을 살아갈 수도 있는 여부를 보기 위한 여행이었다. 공교롭게도, 모든 이들이 말하는 멋진 시칠리아Sicilia는 관광객들이 몰리는 여름 시즌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대면한 시칠리아는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버려진 바닷가와 도로변, 불 하나 켜지지 않는 길고 긴 무서운 터널들과 아직도 열고 있는 몇 안 되는 레스토랑의 바가지 씌우는 가격들 등등,,,,우리가 살아가고 싶다는 느낌은 딱히 오지 않았었다.
팔레르모 Palermo나 카따니아Catania, 노또Noto 같은 약간은 커다란 도시들에서 오는 원동력이나, 산 꼭대기에 만들어진 마을인 라구사Ragusa의 광대함, 길가에서 파는 믿을 수 없을만치 싼 과일들과 야채들, 아직도 장인들이 살아있는 오리지널적인 아트 샾들은 높이 살만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동차가 너무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탈리아는 자동차가 너무도 많은 나라인 거 같다. 이로써, 이탈리아 남부에서 6개월씩 살아가기 프로젝트는 먹구름을 가져왔다. 그 이후에 남부의 여러 곳을 다녀보고, 아이들을 위한 대안적 커뮤니티들도 찾아가 보았었지만, 우리가 찾는 그 무언가가 그곳에는 없었다. 어쩌면, 단순하게 관광 차원으로 갔었다면 눈여겨서 보지 않아도 될 것들도 있었을 텐데, 미래의 정착지를 찾아 헤매던 차에 갔던 터인지라, 적잖은 실망도 있었으리라. 아마도 다음번에 다시 한번 시칠리아Sicilia에 가게 된다면 조금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그곳을 대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찌 되었든, 쓰레기가 좀 굴러 다녀도, 12월 중순에 야외 테라스에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와인잔을 기울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고, 아이들을 걱정 없이 풀어놓을 수 있는 자연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어찌 되었든, 어느 땅을 파도 유물들이 나오는 역사의 땅인 이탈리아의 다양한 얼굴들과 대면하며,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가진 조건 안에서 최대한 즐기고 돌아왔다. 이탈리아 남부 프로젝트의 리스트에서 시칠리아를 X 치면서,,,,
그렇게 여행이란, 얼마 동안, 어디를 다녀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때 그 상황에 나의 인생에 커다란 의미를 줄 수 있는 그 무언가와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행했던 장소와 내 처지가 맞물려서 어쩔 때에는 눈부시게 찬란하기도 했었고, 어쩔 때에는 욕심 많은 나를 기어이 내려놓기도 했었고, 어쩔 때에는 무리해서라도 일상에서 잠시 도망치기 위한 어떤 하나의 방편으로 쓰기도 했으며, 어쩔 때에는 예기치 못한 우연들 속에서 퍼즐을 끼워 맞추며 인생의 항로를 찾아가기도 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