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깨치고 나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만화책 보기와 그리기가 아니었나 싶다. 유리가면, 베르사유의 장미, 캔디, 인어공주를 위하여, 이은혜 작가의 점프 트리 에이 플러스, 아테네, 아르미안의 네딸들, 달의 아이, 꽃보다 남자, 홍차 왕자, 레드 땅, H2 뿐만이 아니라 매달 연재되던 보물섬, 밍크, 점프, 챔프, 르네상스, 나나 등등 또한 섭렵 했었다. 위에 오빠가 있어서, 순정 만화뿐만이 아니라, 북두신권, 드래곤 볼, 닥터 슬럼프, 슬램 덩크, 시티 헌터, 바람의 검심, 란마, 곤 등등,,,, 모든 분야의 만화책들을 샅샅이 보았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남들은 잘 안 보는 희귀한 장르의 복잡하고 몇 천년의 연대를 다 파악해야지만 되는 골치 아픈 만화책 이라던가, 공상과학과 동화나 신화가 어우러지는 만화책 등,,,,, 모든 용돈을 만화책을 빌리는 데에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만화를 잘 그리던 단짝과 매일 같이 공책에 주인공을 그려 넣고, 옷과 머리 스타일을 계속 바꾸며 이야기를 만들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놀기도 했다. 학교 수업 시간에 노트에 수업 내용을 적는 페이지보다, 공책 뒤에 만화 낙서가 더 많이 차지했었고, 이것도 모자라 예고에 들어가서는 만화책을 겁도 없이 찍어내서 지인들에게 팔기도 했었다. 미대를 가서도 만화적 기법을 작업에 도입해서 풀어가기도 했었다.
꽃보다 남자(왼쪽), 슬램 덩크 (오른쪽)
그렇게 만화는 나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의 반쪽에 대한 환상과 기대, 기다림 등이 솜사탕처럼 부풀어져만 갔었다. 하지만 이런 환상의 세계와 현실세계의 간극은 꽤 컸다. 만화적 환상의 세계에서의 여주인공들은 모두들 나처럼 그닥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여자아이이지만, 현실 세계에서 나의 또래 남자아이들이나 인기남들의 눈에 들어오는 기적 같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들에게 나는 인기 있는 타입이 아니었다.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가냘프거나 날씬하지도 않았으며, 남자아이들이 좋아할만치 다소곳하거나 여성스럽지도 않았고, 여우보다는 곰 같은 성격에, 오히려 남자아이들처럼 약간은 괄괄한 성격을 드러내어, 동성 친구 같은 존재였다고 나 할까?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 아무리 미니 스커트에 형형색색의 스타킹이나 확 티는 현란한 색의 옷들을 입어서 길거리에서 가끔 뮤지컬 배우냐고 묻거나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하며, 삐뚤어지고 못마땅한 시선들을 던지는 어르신들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다니던 20대 시절에도 나의 연애에는 봄이 오지 않았었다. 동성 친구들에겐 과감하다못해 과한 나의 패션은 대리만족 상대였고, 이성 친구들에겐 그냥 별나라 외계인이나 와이프보다 편한 여자정도 였다.
로마에서 맨발로 돌아다니던 날 밤(왼쪽), 대학로에서 친구들에게 받은 힐 기념샷(중간), 도쿄에서 여행패션(오른쪽)
또한, 만화 속의 여주인공들은 악간은 어리석거나 마조히즘적인 구석이 있고, 남자 주인공은 너무 멋지고 동경의 대상이면서 성격은 조금은 더럽거나 까칠해야 하고, 사디즘적인 구석도 조금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 쉽지 않은 남자가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나 여느 독자들과 같은 여주인공을 왜 좋아하게 되는지는 언제나 의문이지만, 어쨌든 그의 마음을 가졌을 때 가질 수 있는 성취감! 만족감! 이런 짭짤한 연애 이야기에 한 번쯤은 모두 빠져 보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와 비슷한 류의 남자들은 현실 세계에서는 소위 “나쁜 남자”라고 불리고, 나는 이런 만화적 환상에 휩싸여서 이런 “나쁜 남자”를 짝사랑하곤 했었다. 그러다 불행인지 행운인지가 닥치면 이런 “나쁜 남자”가 나를 돌아봐 주어 뼈 사무치게 가슴 아픈 연애를 하기도 했었었다.
여러 차례 이런 어리석은 연애들을 치르면서 나는 생각했었다. 나의 인생의 반쪽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고! 아니, 있기는 한 거냐고! 그렇게 포기해 갈 즈음, 나는 나의 창작 작업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었다. 마치, 달콤한 연애나 사랑을 가질 수 없다면, 나의 일에서라도 무언가 성취감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작업으로 아픔을 승화시켰다고나 할까?
그러다 나는 또 한 사람을 만났고, 이 사람을 나는 감히 나의 인생의 반쪽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직 인생이 끝나지 않았으니, 장담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사람을 만나서 내 인생의 전체 그림이 바뀌었다. 나의 인생에 아이나 결혼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순정 만화를 그렇게 많이 보고도 이런 생각을 가진다는 게 좀 모순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 나는 영화나 만화에서처럼 멋들어지고 로맨틱한 연애는 꿈꾸었지만, 결혼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내가 이 사람을 만나 3번이나 함께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약속했다. ("한 남자와 3번 결혼한 여자"편을 참고하시면 대략 알 수 있다. https://brunch.co.kr/@anachoi/33 ) 그리고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이 남자의 무엇이 감히 나의 인생의 반쪽이라고 철떡 같이 믿게 했는가?
나의 이탈리안 셰프 요리사 남편 Giorgio
이 남자는 그냥 만화나 영화처럼 한눈에 반하지 않았었다. 이 남자는 보슬비가 내리듯 그렇게 나의 가슴을 조금씩 적셔왔다. 이탈리안인인 그의 멋진 외모로 보아선 바람둥이 일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것과는 달리, 그의 시선은 온전히 나만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살아간 지 거의 8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그가 내게 넌지시 한 고백이 있다. 보통 그의 히스토리를 보면 한 사람과 꽤 오랫동안 관계를 지속해 갔다. 보통 6년에서 8년 정도. 하지만 보통 4년 정도 지내다 보면, 사랑이 지나가 버린다고,,, 그 이후에는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의미로 계속 관계를 이어가곤 했었던 것 같다고,,, 하지만 나와는 오히려 시간이 쌓일수록 처음 만났었던 가슴 설레던 때 보다도 더 강렬하게 자신의 심장이 뛴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우리가 처음 가졌던 가슴 설레는 심장을 유지하게 된 데에는 영화의 “메멘토”처럼 24시간, 길어야 48시간 정도 가는 그의 기억력도 한몫한 것 같다. 아무리 마사지를 해주고, 잘해 주어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이미 없는 일처럼 되어 버리니! 하루하루를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게 만든다. 오랜 시간 알아왔으니까 다 이해하겠지, 다 알아주겠지 하는 생각은 금물이다! 어김없는 그의 메멘토 레이더 망에 걸려버리게 되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지내도 처음 연애했을 때처럼 상대방의 눈을 마주한다. 지루할지도 모를 일상 속에서도 가끔 그는 들꽃에 핀 꽃을 꺾어서 한 다발의 예쁜 꽃을 만들어서 내게 건네주곤 한다. 이렇게 그는 나보다도 더 꽃이 잘 어울리는 남자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약간의 언어적 장벽이란 게 있다고나 할까? 가끔 그가 던지는 말을 못 알아듣고 그냥 넘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떻게 보면 무시한 게 될지도 모르지만, 가끔은 안 듣고 그냥 넘어가는 게 오히려 나을 때도 있는 법! 그렇게 어떨 땐 듣고 싶은 좋은 말만 골라서 듣는 나의 "착한 귀"가 있는 게 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외모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문화, 언어 모든 게 다르다는 게 눈에 확 들어오므로, 서로가 다르다는 걸 배경에 딱 깔고 시작했기에, 서로의 다름을 존중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우리 커플은 다른 커플과는 달리 하루 24시간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같은 공간에서 지낸다. 어떤 커플은 보통 일상 중에 함께하는 시간이 적다가 함께 휴가를 떠나 하루 종일 함께 있어야 함에 곤욕을 겪는다고도 하는데, 우리들은 일 년에 6개월은 24시간 거의 붙어있고, 그가 일을 하는 나머지 6개월 동안에도 그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거나 그의 레스토랑의 디자인적 일 거리를 도맡아서 많은 시간을 함께 한다. 그렇다 보니, 어쩌다가 그가 일 관계로 한나절에서 일주일 정도 가는 출장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 사이 자동차나 비행기 안에서 듣는 오디오 북이라던가, 노래 속에서 내 생각이 떠올랐다며 나에게 헌정하는 노래나 시를 보내주곤 한다. 그렇다 보니, 말이 8년이지 체감으론 평생을 함께 해온 것만 같다. 그와 함께한다는 것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의 반쪽은 만화책 속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처럼 마초도 아니고, 사디즘적이지도 않으며, 무언가 인생의 비밀을 간직한 남자도 아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했을 때 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서슴없이 다가와 주는 남자이다. 밤늦게 레스토랑에서 돌아와 아이들과 함께 잠들어 버린 나의 볼을 살며시 어루만져 주는 남자, 밤늦게 그 후덥지근한 주방에서 땀 흘리고 온 그의 땀 내음마저 사랑하게 만드는 이 남자, 이 남자가 바로 나의 반쪽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