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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arling Mar 31. 2020

남편이 아이처럼 눈물을 흘린다.

#021 스무 번째 이야기

남편이 아이처럼 흐느끼며 눈물을 흘린다. 이는 우리 이탈리아 가족들 채팅창에 87세 되신 시아버님께서 형편이 어려워 끼니를 채우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음식을 만드시겠다는 말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유럽은 하루하루 상황이 달라지기에 무슨 일이 터질지는 그날그날 살아봐야 알 수가 있다. 약 열흘 전부터 전 유럽의 상태가 생각보다도 더 심각해짐에, 남편의 비즈니스에 올 큰 타격을 피할 길은 없었다. 요 며칠간 밤낮으로 골머리를 섞이며 동업자들과 몇 번이고 이야기를 풀어보고, 전 세계 상황들을 뉴스로 주시하며 예상컨대, '어쩌면 운이 좋으면 여름에는 레스토랑을 열 수도 있겠다'에서 '올해 장사는 물 건너간 것으로 생각해야 할거 같다'로 굳어져 갔다. 그럼으로써, 3개나 되는 레스토랑의 어마어마한 임대료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이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레스토랑 하나만 살릴지, 모든 레스토랑들을 정리해야 할지, 레스토랑 건물 주들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전 세계가 위기에 처했기에, 우리로써 손쓸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나이 50이 넘어서 레스토랑을 한순간에 모두 다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남편은 또다시 새롭게 일어설 수 있을 거라는 긍정적 마인드를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고 일주일 만에 이런 청천벽력 같은 소식들로 가라앉은 마음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이탈리아에, 그것도 가장 심각한 밀라노에 사시는 아버님이 자신보다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겠다고 하시는 말씀은 남편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를 끌어올렸었다. 작은 것에도 감동하고 눈물짓곤 하던 남편이지만, 이렇게 아버님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울음을 크게 터뜨리는것은 난생 처음 보았다.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었다. 자기 자신과 가족들, 자기와 함께 길을 가고 있는 동업자들과 자기 비즈니스 챙기기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와중에, 정작 자신의 아버지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생각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남편의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다.

아버님은 오래전에 하셨던 심장 수술과 몇 년 전에 지독한 폐렴, 당뇨로 인해 하루에도 15개나 되는 약을 복용하셔야 하고, 인슐린 주사를 맞으셔야 한다. 몇차례 코마 상태로 병원에 실려가셨었고, 마지막으로 코마 상태로 실려가셨었던게 고작 올해 2월초였었다. 그런 아버님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님은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신다. 남편이 기억하는 이탈리아 집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아버님은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서스름없이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시고(그냥 하루가 아닌 매일같이), 많은 친구들이 식전이나 식후에도 아버님을 찾으러 오셨었었다. 언제나 아버님 집에는 대략 8-10명 정도의 사람들이 들락날락했었고, 이중에는 나의 남편이 이탈리아를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 때에도 예전처럼 아버님께 인사드리러 오는 남편의 오래된 친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세월이 많이 지나, 형편이 괜찮아진 이들이 다시 아버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 혹은 아버님과의 즐거웠던 그 조촐한 식사를 추억하며 다시 아버님을 다시 찾아뵙기도 했다. 그렇다면 아버님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분이셨을까? 절대 아니었다고 장담한다.


언제나 아버님 곁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italy


아버님은 25년을 함께 했던 사랑하는 아내를 나이 50에 잃으셨었다. 그의 아내는 자궁암으로 3년을 앓았었고, 그는 그의 아내를 위해서 직장도 때려치우고 아내의 병치레를 옆에서 돌보았었다.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유일하게 그에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부모님이 물려준 집과 22살 먹은 큰 딸과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는 17살 먹은 아들(나의 남편)과 13살 난 어린 딸뿐이었었다. 은행 잔고는 바닥이 났고, 직장을 잃은 지는 이미 3년이 되었었다. 그녀가 떠나고 아버님은 잠을 이루지 못하셨으며, 담배를 많이도 피우셨다고 한다. 그 시절에만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자크에 폴리 염화 비닐을 달아서 열을 가하면 간단하게 연결할 수 있는 기계를 직접 고안하고 발명하셔서 쉴 새 없이 일을 하셨다고 한다. 그 일이 성공해서 다행히 경제적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으셨고, 몇 년이 지나 30년을 넘게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동반자이신 까르멘 Carmen을 만나셨다.


돌아가신 남편의 어머니인 Franca와 아버님 Luigi , 누나 Christina, 여동생 Rafaella와 나의 남편 Giorgio, 여전히 아버님은 이 집에서 살고 계시다.


카르멘 Carmen을 만나시고나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셨는데, 캠핑카를 구입하셨었다. 캠핑족이 되신 것이다. 은퇴를 하신 후에는, 매년 가을과 겨울이면 이탈리아 남쪽으로 캠핑카를 끌고 몇 달을 지내시기도 하시고, 조금 더 젊으셨을 때에는 (70대 때) 이탈리아에서부터 프랑스와 스페인을 거쳐 세비야의 아들네미를 보고, 모로코 Moroco까지 건너가셔서 몇 달간 지내고 오시기도 하셨었다.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캠핑족 친구들을 사귀고, 이들과 왕래하며 누구보다도 더 활기차게 인생을 살아오셨다. 또한, 20살 때부터 시작된 버섯에 대한 열정으로 버섯이 나는 시기면 바쁘게 버섯을 캐러 다니시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그래서 심장 수술 이후로는 비행기 타시는 것을 꺼려하셨건만, 남편이 세비야 근처에 (포르투갈에 가까운) 버섯들이 많이 나는 곳을 발견했다는 말에 비행기를 타시고 세비야까지 한걸음에 오시기도 하셨었다. 그때 연세가 80이셨었다.


버섯 박사님이 바구니 한가득 직접 캐오신 버섯 컬렉션, Italy


언제나 여러 사람들에게 식사를 마련해 주시던 아버님이었기에, 우연한 기회에 친구의 Bar에서 요리사로 일하시기 시작하셨고, 이를 계기로 Al Solito Posto라는 이름으로 레스토랑을 열게 되셨다. 그때 아버님의 나이는 55세이셨다. 남편은 아버님을 돕기 위해서 8년을 아버님과 함께 Al Solito Posto에서 일을 했었고, 이후에 스페인으로 건너가 Al Solito Posto라는 이름으로 세비야 Sevilla에 2군데, 스페인 남부 바닷가인 카디스 Cadiz근처의 Zahara de los Atunes에 같은 이름으로 3번째 레스토랑을 열어 14년 동안 레스토랑들을 운영하며 요리를 했었다. 그리고 나의 남편은 세비야에서 길거리에서 발품을 팔아가며 여러 가지 민속품들을 파는 아프리카 출신 친구들에게 오후에 레스토랑 시간이 끝나갈 즈음 그들이 오면, 가족을 대하듯 이들에게 음식을 대접했었다. 그들의 물건들을 사서 집에 걸어두기도 하며 최대한 그들을 도왔다. 또한, 그의 전 여자 친구이자 아직도 인생의 중요한 친구인 여성인권 변호사인 바네사 Vanesa (그녀는 스페인의 여성 인권 법까지도 바꾼 여자이다!)의 요청으로, 일이 필요한 이들에게 주방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들를 만들어 주었었다. (사랑의 형태는 바뀔 수 있는 것 https://brunch.co.kr/@anachoi/31 참고) 그렇게 남편은 아버님을 닮았고, 닮아가려고 한다.


가족 중심으로 이뤄진 그 당시 꽤 유명했었던 첫 Bar인 Al Solito Posto의 할로윈, Italy


교육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이 아닌, 행동을 보고 배운다고. 87세의 연세에도 나의 시아버님은 50넘은 자신의 아들에게 말이 아닌 행동으로 삶에서 무엇이 정말 중요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몸소 가르쳐주신다. 우리가 보는 사망자 숫자는 그냥 숫자가 아니다. 이들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여동생, 누나, 오빠, 남동생, 친구, 선생님, 학생, 제자이다. 세상 곳곳에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번지는 이 무서운 전염병으로 하마터면 우리는 그냥 우리 알 속에 꼭꼭 숨어서 우리의 안전만을 염려하며 지낼 뻔하는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인생에서 안전한 길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세상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세상이 변하기를 우리는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나 자신에게 먼저 반문해 본다.


가끔 이렇게 손자 손녀들에게도 큰 웃음을 주시는 유쾌하고 쎈스 쟁이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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