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되는 이야기

by 롸이언

어제는 아버지 제사였다. 벌써 15년이 지났다. 이제 아홉 번만 더 지내면 아버지와 나는 동갑이 된다. 너무 어렸다. 나도, 아버지도. 아직도 궁금하다.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아버지는 종종 내게 자신의 젊음을 자랑했다. "네가 나이를 먹어도 아빠가 여전히 일할 수 있을 거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러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없으면 네가 가장이야. 잊지 마." 어떤 말이 진심이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몇 년 만에 지내는 제사였다. 모든 음식을 나와 동생이 준비했다. 제대로 된 음식이라 하기도 민망했다. 동생은 소고기무국과 동태전을 만들었고, 나는 스테이크와 숙주나물을 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아빠가 좋아했던 음식 중, 여기서 구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조기나 굴비를 찾으려고 온갖 마트를 돌아다녔지만 끝내 없었다. 아빠가 좋아했었는데. 생물은커녕 냉동조차 없었다. 한국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런 순간엔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다른 음식은 뭘 좋아하셨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조금씩 이해하려고 할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고,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집을 좋아했다. 유전적으로 술도 약했다. 그래서인지 친구도 많지 않았다. 남들 눈에는 재미없는 삶처럼 보였지만 아버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었다. 취미는 독서. 우리 집엔 항상 읽을 책이 쌓여 있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으셨다.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 것도 아버지 영향이 클 것이다. 늘 무언가를 읽거나 보고 계셨다. 어릴 때 가끔 책 대여점에 같이 가서 십만 원어치 가까운 만화책을 빌려오기도 했다. 밤늦게까지 과자를 먹으며 가족들 각자 자리를 잡고 만화를 읽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아버지와 만화를 함께 읽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아침마다 구부정하게 앉아 신문을 펼쳐 보던 모습도 익숙하다. 아버지의 최종 학력은 중학교 중퇴였지만 한자를 많이 아셨다. 똑똑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나로 태어났다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현명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영화도 많이 보셨다. 영화관도 자주 갔고, 집 근처 비디오 대여점의 VIP였다. 주말마다 두세 편씩 함께 봤다. 『영웅본색』, 『동사서독』, 『붉은 10월』 같은 영화들. 케이블 TV가 연결된 후엔 TV는 늘 영화 채널에 고정돼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비스듬히 누워 『웰컴 투 동막골』을 보며 웃으시던 장면이다.


보고, 읽고, 느끼고, 생각은 많았지만 말로 꺼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감정과 고민을 혼자 삭이며 살았던 것 같다. 어린 나는 아버지의 마음속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었는지 몰랐다. 그냥 아빠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여겼다. 친하지 않았다. 친해지기 어려웠다. 그래서 엄마 편을 들었다. 엄마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사람이었다. 이해하기 쉬웠다. 서로 말을 하지 않는 부자는 서로를 잘 몰랐다.


나이를 먹어가며 조금씩 알게 됐다. 아버지는 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대화할 상대가 없었던 거였다. 아버지와 엄마는 잘 맞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입을 닫았다. 둘은 성격이 달랐다. 자주 다퉜고, 아버지는 어느 순간부터 말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생각을 정리한 뒤에 말하는 사람이었고, 엄마는 말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이었다. 그 시차가 둘 사이를 자주 엇나가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지만, 과정 속의 어긋남이 서로를 지치게 했던 것 같다. 어릴 적 엄마를 닮았던 큰아들은 나이를 먹으며 점점 아버지를 닮아갔고, 그제야 아버지도 조금씩 말을 트셨다. 홍제천 산책로를 함께 걸으며 알게 됐다. 아버지가 얼마나 답답했는지. 아마 그 무렵 처음으로 엄마에게 화를 냈던 것 같다. 아빠한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아버지도 한 사람이라는 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2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프셨다. 유학 중이었고, 주 1회 통화에서 자주 기침을 하셨다. 병원에 가야 하지만 바빠서 못 간다고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감기인가 보네,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는 통화를 거의 못했다. 바쁘다며 전화를 바꿔주지 않았다. 여름방학에 한국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공항에 마중 나오지 않으셨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집에 들어가니 빡빡머리의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두상이 못생겨서 민망하다며 멋쩍게 웃으셨다. 그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1년도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마지막 길도 지키지 못했다. 그놈의 유학이 뭐라고. 런던에서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가셨다고. 매일매일 전화해도 모자랄 판에, 괜찮아지고 있다는 말만 믿고 2주 가까이 통화조차 못 하고 있었는데. 휴학을 했어야 했는데. 굳이 그때 졸업하지 않아도 됐는데.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조금만 더, 아버지를 알아뒀어야 했다. 이제는 엄마도 없으니 아버지를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다. 기억의 조각을 이리저리 끼워 맞춰 피규어 마냥 세워 놓고 하염없이 보고 있다. 우리 아버지는 이런 분이었노라고. 대화가 필요했다. 적어도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어야 했다. 정말 조금만 더 일찍.


그래, 맞다. 사실 좋아하는 음식을 더 많이 알았다고 해서 더 많이 만들었을까. 그게 중요한 건 아닌데. 뭐가 예쁘다고. 가족을 두고 먼저 간 사람이 뭐가 예쁘다고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줄까. 그런데도 채우고 싶었다.


오래도록 지내지 않던 제사를 갑자기 지낸 건, 그냥 인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고 싶었다. 아버지, 저 이제 힘든 고비 하나 넘겼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당신 없어도 잘 살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고, 갑작스러운 가장의 부재로 집안이 흔들렸다. 빈자리가 컸다. 버티고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호주로 왔다. 그런데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며, 코로나가 터졌다. 일은 잘리고, 얼마 남지 않은 저축은 점점 줄어갔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호주에 남을 수도 없는 상황. 정신을 부여잡고 겨우 버텼다. 그래, 내가 가장이니까. 그렇게 버티다 보니 아주 조금, 숨통이 트였다. 스스로 기특했고, 칭찬받고 싶었다. 그런데 머나먼 타지에는 그럴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고. 칭찬해달라고. 그냥 그랬다.


음식을 올리고 절을 한 뒤, 문 앞으로 나갔다. 혹시나 정말 귀신이 있다면, 제사밥을 먹으러 이 먼 나라까지 오셨을까. 혹시 집 주소를 몰라서 못 들어오고 계신 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그랬다. 문 앞에 서 있으면 집을 찾기 조금은 쉬우시지 않을까 싶었다. 그냥,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국이 다 식을 때까지 문 앞에 서 있었다. 정말 우리 집 골목 앞에 아버지가 서 계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 뭐 이렇게 집 찾기가 어려워. 야 이 간나새끼, 그냥 서울에 살지, 뭐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힘들게 하냐."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아내가 정성껏 탄 커피를 마지막으로 올리고 절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골목에 켜둔 초를 끄러 나갔다. 바람이라도 불어 나뭇잎이라도 하나 굴러다녔으면 왔다 간 거라고 상상이라도 했을 텐데, 바람 한 점 없었다. 그래서 슬펐다.


벌써 15년이라니. 꿈에서 아버지를 본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늘 그 자리에 계신다. 꿈속의 나는 아버지에게 말을 걸고,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다 문득 깨닫는다. 그리고 말한다. 어? 아빠 죽었는데? 왜 여기에 있어? 그러면 아버지가 웃는다. 나도 웃는다. 그리고 깬다. 베개가 축축하다. 언제가 되면 덤덤해지려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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