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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하면 안되는 실무자, 창작의 고통속 부서장이 기획

이리로 와요여기 앉아서 같이 프레임을 얘기합시다.


 내가 한미연합사령부의 전략 기획부서에 들어갔을 때, 책임자였던 미측 사무실의 미국인 처장뿐 아니라 그 누구도 ‘기획안을 언제까지 만들어서 가져와 보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이렇게 말했다.

 “이리로 와요. 여기 앉아서 같이 이야기 합시다.”

그것은 내가 그 부서를 떠날 때까지도 유지되었다. 


 미국인들은 사무실 문을 열면 방끗 웃으면서 인사한다. 모두가 누가 들어왔는지 볼 수 있게 책상을 두었기 때문이다. 벽을 향하게 하고 책상 중앙에 컴퓨터 모니터를 두기에 각자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쪽 사무실과는 달랐다. 각자의 책상에 앉아 말없이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는 게 주 ‘업무’이며 사무적인 느낌이 가득 차 고요한 사무실의 모습도 없었다. 그냥 다른 것 뿐이다. 어느 쪽이 좋다 나쁘다는 없었다. 


 미측 사무실에는 미국인 처장을 제외한 4명이 있었다. 그들은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자신의 머그컵에 커피 한잔 따라두고 리갈 패드에 낙서를 하며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리로 와요. 여기 앉아서 같이 이야기 합시다.”

늘 같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들은 ‘프레임’을 만들고 있던 것이었다. 여기서 ‘프레임’은 문제를 정의하고, 접근방법을 설계하고, 데이터를 선별해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인간의 고유 능력을 말한다. <프레임의 힘>이란 책에서 설명하는 개념이다. 우리가 선택해서 적용하는 심성모형이 프레임이다. 프레임은 우리가 머릿속에 어떤 모델을 만들어 우리에게 세상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하게 한다. 같은 상화이더라도 프레임이 다르면 다른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이 대화를 통해 알고자 했고 만들고자 했던 것이 바로 프레임이었다. 



기획서를 쓰면 절대 안 되는 기획자

     

 “아. 오늘은 처장님에 대해서 말 해 줄게요”

 “그는 약간... 광기가 있어요.” 

 “뭐... 캐릭터는 차차 겪어가면서 알게 될테니...”


무엇이 그렇게 재밌는지 얼굴이 빨개지도록 킥킥대며 웃었다.

뭐라고 대답해주어야 할지 난감했지만 꼭 이럴 때 그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처장이 들어왔고 똑같이 큰 테이블에 앉았다. 

 처장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내가 절대 하면 안 되는 것부터 이야기 해주었다. 우리 쪽에서 자주 하는 실수들이라 어쩔 수 없이 얘기해주는 것이니 기분 나빠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이런 식의 말을 유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듯 하다.  


 첫째, 절대 보고서를 미리 만들어 오지 말 것. 읽지도 않고 찢어버릴 것이다. (이건 농담이 아니었던 듯 하다.)

 둘째, 우리가 잘 모르는 것들을 말해 주는 것은 대환영.   

 셋째, SWOT, STP, MECE 등등 이미 알려진 분석툴, 도표, 그래프를 넣으려고 하지 말 것. 필요 없음. 


 미국인 처장의 말대로라면, 나는 절대로 기획서을 쓰면 안 되는 기획자였다. 기획부서로 가게 되었으니 기획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싶어서 잔뜩 쌓아두고 읽었던 기획 관련 서적들에 나오는 말들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이 또한 이 책을 쓴 계기이기도 하다. 


 특히 사이버 방호태세를 등급으로 나누어 경고하는 것을 예로 들며 멍청한 짓이라고 비난했다. 작전부서에서 전략상황을 컬러코드로 표시해달라고 그럴 수 있으면 전략이 아니라고 하며 거부했다. 다들 난감한 표정을 짓긴 했다. 


 그렇다면 난 그 흔한 보고서를 안 쓰고 무엇을 했을까?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 전략 디자인팀은 전략을 제안하는데 Art와 Science, 좌뇌와 우뇌처럼 일하고 있다.’ 이것은 여러 나라의 군사교범에서 말하는 기획에 나온 개념과도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제 갓 들어온 나를 포함한 5명은 ‘Scientific’한 부분을 맡았다. 이를 테면 각종 씽크탱크에서 나온 아티클, 논문, 언론보도자료, 분야별 전문 매거진, 학회자료를 수집하고 자신이 조사한 내용들을 공유했다. 대학에서 조발표준비하는 것과 거의 같았다.

 여기서 무언가 독창적인 컨셉을 추출하는 ‘Artistic’ 한 부분은 부장이 독점했다. 우리도 흉내를 내면서 몇 가지 의미있는 제안을 해보긴 했는데, 그는 우리의 도전에 놀라워하며 그 다음 날 전혀 생각지도 못한 구상을 선보이곤 했다. 그냥 그는 천재였다.   


결재가 없다결재가 있다.

     

  미국인들과 일하는 사무실은 한국인들과 함께하는 사무실의 맞은편에 있었다. 그러니까 복도를 사이에 두고 건너가면 미국, 돌아오면 한국이 되는 느낌이었다.

  한국 사무실의 상급자들도 만만치 않은 위인들이었다. 다만 그들은 나를 부를 때 직책 말고도 ‘실무자’라고 불렀다. 미국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말로 설명하고 그들이 만든 보고서를 번역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한국 사무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업무들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실무자인 나로부터 기안된 보고서가 필요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보고서들은 기안자인 나를 시작으로 과장, 처장, 부장, 부사령관 등 직제를 타고 결재를 받아야 했다. 중요한 결정을 요하는 보고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재라인을 만들어야 했다.

 같은 내용을 복도 맞은 편 미국으로 보낼 때는 번역해서 메일로 보내면 되었다. 일부는 다른 부서에도 보내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참조라고 불리는 CC에 넣으면 되었다. 그런데 이게 다였다.


 “그런데 문서에 결재는 안 해요?” 

 “메일에 코멘트 했잖아!” 

 그들은 결재라인이 없었다.


     

3일이면 완성되는 임팩트 있는 전략


 어떠한 주제이든 단 3일 만에, 관련 부서들과 협의하면서도 굉장히 임팩트 있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이 내용을 주어진 짧은 시간동안 연합사령관에게 보고하고 승인받는 과정을 지켜보며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 과정을 ‘Strategic Shaping’이라고 불렀다. 


  ‘이래서 미국이 세계 최강인 것인가?’ 그들이 만든 보고서는 힘이 있었다. 미사여구로 화려하게 수식하거나 가능성이 희박한 희망사항을 늘어놓지 않았다. 현실세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이 기획안이 승인되면 어떻게 어떤 군사작전으로 이어져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쉽게 말해 현장이 어떤지 알고 기획하는 것은 말 할 필요 없는 기본중의 기본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획전문가 스쿨에 들어온 느낌이 들 정도였다. 결정적으로 왜 부서장의 연봉이 그렇게 고액인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보여주는 천재성은 메이저리그 선수를 보는 느낌이랄까. 내가 여기서 일했던 경험은 베르베르가 <뇌>에서 말한 절대쾌감이 느껴질 만큼 강렬하기도 했다. 덕분에 그 부작용으로 다른 조직에 갔을 때는 천재성의 부재가 주는 삭막함 때문인지 흥미를 잃고 향수병에 걸린 듯 살았다. 이 극렬한 격차가 이 책을 쓴 계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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