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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무게

이렇게 전쟁이 빈번한 세상을 겪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by 구형라디오

내 아들도 7년 뒤 군대를 가야 한다.


한국에서 남자로 태어났다면, 당연하다는 듯 입대한다.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아빠들은 생각한다. 징집제니까.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감이라기보다는, 그냥 피할 수 없는 숙제처럼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다. 내 아버지도 다녀왔고, 나도 다녀왔고, 아들도 차례가 올 것이다.


하지만 문득 생각이 멈춘다. 내 아이도 언젠가 입대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어느새 총성과 폭격 속에 하루를 살아내는 전 세계 또래 아이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우크라이나, 가자지구, 이란, 러시아, 이스라엘... 전쟁 뉴스는 익숙할 정도로 쏟아지지만, 그 안에 사는 아이들의 삶은 상상조차 어렵다. 우리의 아이들은 수학 숙제가 많다며 투덜대지만, 그 아이들은 오늘도 대피소로 달려간다. 내일이라는 단어가 보장되지 않는 삶. 그게 그들의 현실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다시 펼쳤다. 전쟁. 누가 책임지는가? 미국은 늘 '고민 끝에 결정했다'며 참전한다. 그런데, 너무 자주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다. 왜 그럴까? 모병제가 있어서다. 직접 총 들 사람은 따로 있다. 정작 결정하는 사람은 클릭 한 번이면 된다. 전쟁은 숫자와 전략으로 설계되고, 참전은 도의적 책임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 된다. 프랑스는 외인부대가 있고, 민간 군사기업은 계약으로 움직인다. 북한조차 파병으로 외화를 번다. 모두들 ‘대리인’을 앞세운다. 위험은 싸게 넘기고, 명분은 비싸게 포장한다.


지난달 별세한 한국전 참전용사, 미국 하원의원 찰스 랭글은 “국회의원 자녀도 전쟁에 나가야 했다면 이라크 전쟁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건 그냥 날카로운 풍자가 아니다. 진심이다. 위험이 공평하지 않으면, 판단도 가벼워진다. 미국이 그렇게 많은 전쟁에 "생각 끝에" 나설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 전쟁이 ‘남의 일’이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한국은 그나마 징집제로 전쟁의 부담을 넓게 분산시키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정작 권력 있는 사람들은 빠져나간다. 병역 비리는 여전히 뉴스에 오르내리고, 군필자와 미필자의 간극은 은근히 사회에 스며들어 있다. 우리도 ‘대리인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내 아들이 군대에 가는 날, 나는 바라게 될 것이다. 제발, 공부가 싫다고 투덜댈 수 있을 만큼 평범한 세상이길. 그러나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터에서 숨죽이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의 무게가 모두에게 똑같이 떨어지는 날이 올까? 클릭 한 번으로 시작된 전쟁을, 버튼을 누른 그 손이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그럴 때에야 비로소, ‘정의’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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