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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날로그 남샘 Feb 07. 2022

최선을 다할수록 커지는 흰곰

생각은 생각대로 둔 채 지금 하고 있는 것을 해보기

 흰곰은 우리가 경험하는 불편한 생각, 감정 그리고 기억들이며, ‘피부 안의 세상’에 속합니다. 낙서를 한 종이를 깨끗하게 지울 수 있는 ‘피부 밖의 세상’과는 달리, 흰곰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수록 '피부 안의 세상'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흰곰을 더 자주 만나게 되며, 흰곰은 더욱 커지고 강해집니다. 

 ‘흰곰 효과’은 하버드대학교 사회심리학자인 대니얼 웨그너(Daniel M. Wegner)가 동료들과 한 연구에서 밝혀졌습니다. 이 실험에서, 흰곰을 떠올리지 말라고 지시받은 그룹일수록 흰곰을 생각한 빈도가 자유롭게 흰곰을 생각해도 좋다는 그룹보다 더 높았습니다.

 이처럼 생각을 억누르려고 할수록 오히려 더 그 생각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는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paradoxical effects of thought suppression)’는 불편한 생각, 감정 그리고 기억들을 억누르는 것이 우리의 의지와 능력의 문제가 아님을 알려줍니다. 

 불편한 흰곰을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커지고, 그렇다고 불편한 흰곰을 바라보는 것도 너무 힘이 들 때 교실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6학년임에도 불구하고 1학년 아이처럼 친구들과의 사소한 다툼에도 선생님에게 와서 이르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선생님에게 와서는 방금 있었던 일뿐만 아니라 예전에 다툼이 있었던 일까지 가져와서 한참을 열을 올리며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분명 이야기의 시작은 쉬는 시간에 있었던 일이었는데, 어느새 예전에 이야기해서 끝났다고 생각했던 일까지 끄집어내서 선생님을 곤란하게 하는 친구였습니다. 수업시간이 다가와서 이야기를 끊고 자리에 돌아가라고 해도 생각에 빠져 있는 친구는 자기 이야기만 하느라 수업 시간이 된지도 몰랐습니다.

 생각에 빠지면 지금이 보이지 않습니다. 생각에 따라 나오는 감정들과 기억들이 점점 커져서 지금은 과거가 되고 의식은 ‘피부 안의 세상’에 잠깁니다.

 ‘흰곰 실험’에서 살펴본 것처럼, 생각에 빠진 친구에게 그 생각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방금 일만 이야기하라고 해도 이미 커져버린 흰곰은 물러가지 않고 버팁니다.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그 친구의 이야기를 다 담을 순 없습니다. 커다란 흰곰 외에는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친구에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먼저, 아이의 말을 잠깐 끊습니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쳐서 눈까지 가져가도록 하고 무엇이 보이냐고 물어봅니다. 아이는 당연히,

 “손바닥이 보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손바닥을 눈에서 최대한 멀리하고 어떤 것들이 보이냐고 물어보면,

 “손바닥도 보이고, 선생님도 보이고, 친구들도 보여요.”라고 말합니다.

  손바닥을 ‘생각’이라고 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을 조금 더 멀리해보도록 합니다.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억압’하는 것이 아닌, ‘생각’은 생각대로 둔 채 생각 외에 다른 것들도 볼 수 있는 경험을 해보도록 하는 것이지요. 머뭇거리던 아이는 한참 열을 올리던 이야기를 중단하고 자리로 돌아갑니다. 생각에만 빠져있을 때 보이지 않았던, 수업을 기다리는 친구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생각이 들었을 때 우리는 그것에 빠져서만 지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생각을 억누르려고 한다면, 흰곰은 커지기만 합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은 손바닥을 눈앞에서 멀리 두는 것처럼, 흰곰을 우리의 시야에서 떨어뜨리지는 않은 채, 그 생각이 존재하는 순간 속에 있는 다른 풍경들도 함께 시야에 두는 것입니다. 손바닥을 머리 뒤에 감추거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치워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없애려는 이기고 지느냐의 싸움에서 벗어나서, 생각이 나면 생각이 나도록 두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생각과의 싸움에 빠지지 않는 방법입니다.

 위의 연습이 ‘수용-전념 치료’의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수용 전념 치료에서는 불편한 생각과 감정 그리고 기억들이 문제라고 보지 않습니다. 뒤에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불편한 생각, 감정 그리고 기억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조건이며, 문제는 그것을 외면하기 위해 다른 행동으로 덮어버릴 때 발생합니다.

 교실에서 우리를 작아지게 하는 경험들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우리는 그 경험들을 따라오는 생각, 감정, 그리고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외면하거나 억누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흰곰 효과’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럴수록 더 자주 흰곰을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원치 않는 생각이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은 의지와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혹은 잘못되어서 그런 생각, 감정, 그리고 기억들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자꾸 머리에 떠오르는 흰곰이 있나요? 그럼 그 흰곰을 손바닥이라고 생각하고 눈앞까지 두었다가 천천히 멀리해 보는 연습을 해봅시다. 멀리 한 손바닥만 보지 말고 지금 이 순간 함께하고 있는 다른 풍경과 잠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해보세요. 그리고 다시 손바닥을 봅니다. 손바닥을 눈앞에 두었을 때보다 커 보이나요? 손바닥의 크기는 변하지 않았음을 기억합니다.


* 참고 도서: 이선영. (꼭 알고 싶은) 수용-전념 치료의 모든 것. 서울: 소울메이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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