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은... 술을 많이 마셨어... 그냥 마취 같은 거... 그리고 그냥 칼로 그랬지 뭐.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가로로 그으면 안 죽는데. 동맥 따라 세로로 그으면 확실히 죽는다고 그러더라."
나는 담담하게 말했고, 너는 나를 따라 몸을 일으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죽고 싶었어?"
죽고 싶었어라... 글쎄.
"응..."
"다신 그러기 없기. 맹세해."
"그럴게."
"오래 살아."
"너도."
2017년 여름밤, 그날의 맹세를 끝으로 너는 사라졌다. 헤어지자는 말도 그 흔한 작별 인사도 없이, 단 한 장의 메모도 남기지 않은 채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인 것처럼 나는 너를 다시 볼 수 없었다.
전화기는 꺼져있고, 너의 집을 찾아가도 네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날이 잘 서린 회칼에 토막 난 생선 대가리처럼 순식간에 끊어졌다.
나도 굳이 열심히 찾지 않았던 것 같다. 나도 버려지는 데는 꽤나 익숙한 사람이니까.
다시 2019년 7월.
나는 공원에서 실컷 눈물을 쏟은 뒤 집으로 돌아와 술과 수면제를 입에 쑤셔 넣고 잠이 들었다.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있다는 것을 신기해하면서.
그날 밤 꿈에서 너를 다시 봤다.
꿈속 세상에선 밤새 비가 왔나 보다. 딱딱한 아스팔트 도로에 고인 빗물에 각종 불빛들이 반사되어 반짝였고,
너는 그 불빛 위에 서있었다. 네가 많이 아껴서 비 오는 날에는 죽어도 꺼내지 않았던 푸른색 구두를 신고 베일처럼 나풀거리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는 여전히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하얗고 작은 손등으로 너의 눈을 가려서, 환하게 드러난 치아를 보고서도 나는 네가 웃고 있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훗날 꿈속 너의 미소는 울음이었다고 확신한다.
네가 뭐라고 웅얼거렸다.
"뭐라고...?"
잘 들리지 않았다.
"잘 안 들려. 뭐라고...? 다시 말해 줘. "
나는 네게 다가갔지만 좀처럼 그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갑자기 네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소리치듯 내 귓가를 때렸다.
"살고 싶었어?"
호통에 가까운 네 목소리에 나는 거의 발작하듯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전 7시. 핸드폰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방 안은 가관이었다. 냉장고는 '삐삐' 경고음을 내며 활짝 열려있었고 멧돼지가 무덤을 파헤친 것 마냥 음식들이 바닥에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술병이 바닥을 굴렀고 담배꽁초는 재가 되어 흩어져 있었다. 짜증에 잠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가 먹는 수면제는 강한 효과만큼이나 부작용이 몇 개 있었다.
첫 번째는 약을 먹은 순간부터 잠에서 다시 깰 때까지의 모든 기억을 삭제시킨 것이었고, 두 번째는 약이 나의 에고 ego와 슈퍼에고 suepr ego를 잠재우고 나를 오직 이드 id 만이 존재하는 상태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술과 함께 들어가니 그 부작용이 배가 되었다. 두 가지 부작용의 결과물로 나는 배가 고픈 채로 잠이 들면 냉장고를 열어 닥치는 대로 뭔가를 입에 쑤셔 넣었고, 누군가에게 화가 난 상태로 잠이 들면 굳이 그 밤에 전화를 해 헛소리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래서 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핸드폰을 서랍 속 깊이 넣어 둔 채 잠드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데 그날은 핸드폰이 탁자 위에 놓여있었다.
'아 또 누군가한테 지랄을 해댔구나.' 마음이 몹시 초조해졌다.
나는 냉장고 문을 신경질적으로 닫고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수화기 너머로 경찰은 너의 사망소식을 차분한 어조로 전달했다.
2년 전에 이별한 연인에게 전화한 의중을 물으니, 경찰은 그녀의 마지막 발신 번호가 나라고 했다.
취조 아닌 취조가 계속되었지만 기억이 삭제된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일단 알겠다며 전화를 끊고 휴대폰 수신목록을 보았다. 새벽에 너로 짐작되는 번호로 한 시간가량 통화 기록이 찍혀있었다.
미안하다.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아. 무슨 말을 했는지, 우리가 웃었는지 울었는지 아니면 둘 다였는지.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라 네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미안해.
나는 그날 밤 너의 장례식장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수화기 너머의 경찰과 담배를 태우며 내 상황을 일러바치고, 등가교환의 법칙으로 정보를 얻었다.
너는 내가 알려준 대로 가로로 손목을 그어서 이 세상을 떠났다.
"살고 싶었어?"
꿈속의 너는 내가 만들어낸 환상일까. 삭제된 기억의 일부분일까.
아니면 두 가지가 우연히 맞물린 운명의 장난일까.
나는 글을 지금도 정답을 알 수 없다. 나 없는 내 인생의 한 토막이니까.
하지만 네 질문의 답을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응. 난 살고 싶었나 봐.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싶었나 봐. 죽는 게 너무 무서웠어.
죽고 싶다고 버릇처럼 말하고 다녔지만 사실 나는 겁쟁이거든...
바보야 그래서 상처 있는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하잖아. 상처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