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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 Oct 24. 2021

태풍이 지나간 자리

느닷없이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는 법

 새벽까지 내린 비로 산책길이 질퍽하다. 태풍은 이미 지나갔지만, 여파로 회오리 같은 바람이 불었다. 여름의 끝자락이지만 그래도 한낮에는 뜨거운 편인데, 오늘은 이따금 휘몰아치는 바람이 공기를 흔들어 숲에 선선한 기운이 돌았다.

 주말 사이에 무지막지하게 들이닥친 비바람에 숲이 잔뜩 헝클어졌다.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나뭇가지들과 낮고 여린 풀들 사이로 어질러진 솔잎과 솔방울들이 간밤의 숲이 맞닥뜨린 상황을 짐작게 했다. 갑작스레 찾아든 손님에 당황했을 텐데 쫓아내지 않고 그대로 자리를 지키며 기꺼이 맞이한 모양이다. 휘어지고 부러진 숲은 자신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짓궂은 손님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그마저도 자신의 모습으로 품은 모습이었다.


 출근할 때마다 꼭 확인하는 자리를 찾아 나선다.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녀석들. 어쩐지 계속 마음이 닿는 녀석들을 살피러 간다. 세찬 바람에 날아가지는 않았을까, 폭우에 떠내려가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잘 있으려나. 발걸음이 조급해진다.




















 첫날부터 관찰하려고 찜해 둔 소나무 가지. 숲길 중간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열 걸음 정도 지나면 보인다. 나뭇가지 하나가 무심히 툭 떨어져 있었는데 거기에 달린 초록빛 솔방울이 참 예뻤다. 태풍의 거센 바람에 가지의 방향이 조금 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한눈에 알아봤다. 초록빛이었던 열매가 그사이에 갈색빛으로 물들었다. 솔방울은 비늘 같은 날개를 달고 있는 종자들이 격자무늬로 층층이 규칙적으로 달려있다. 초록빛으로 달렸던 열매가 시간이 흐르면서 갈색으로 변한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진한 연두색이었던 열매가 며칠 사이에 갈색으로 물들어 겨우 끄트머리의 세 개의 층만 초록빛으로 남아있었다. 며칠 만에 어린 열매가 부쩍 성숙해졌다. 어디로 멀리 날아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어 다행이다.



 다음 녀석들을 찾아 부지런히 걷는다. 이번엔 내 맘대로 정한 나의 나무. 소나무 가지가 있는 곳에서 몇 걸음 안 되는 곳에 있다. 키 큰 어른 나무들 사이에 작은 꼬마 나무가 덩그러니 있어 더 눈에 띄었다. 사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어린나무가 아니라 목(木)생 2회차 나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처음엔 묘목이 자란 모습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잘려 나간 나무 기둥에 새로운 가지들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나무의 정체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내 식구처럼 매일 들여다보고 있다. 태풍을 잘 견뎌냈을까? 겨우 뻗은 어린 가지들을 잃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웬걸! 너무도 당당한 모습으로 눈부신 햇살 조명 아래 서 있었다. 주먹을 꼭 쥐고 가슴을 탕탕 치며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나 잘했죠?!’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 잘했다, 잘했어! 최고야! (엄지 척) 내가 키운 건 아니지만 거참 뿌듯하다.


 

















마지막 걸음은 두 번째 책방을 지나 너른 들판으로 간다. 가장 걱정스러운 녀석들을 보러 가는 길이라 마음이 앞서 발걸음이 꼬인다. 마른 솔잎 사이를 뚫고 살포시 돋아있던 버섯돌이들. 아직 갓을 펼치지도 못한 채 엄지손가락처럼 생긴 두 녀석이 꿈틀꿈틀 올라오고 있었다. 뜨거운 날씨에 오히려 조금 힘겨운 모습이라 모처럼 시원하게 내린 비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가도, 너무 많은 비와 세찬 바람에 쓰러져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싱숭생숭했다.


 ‘이쯤이었는데, 분명’ 몇 번째 같은 자리를 맴도는지 모르겠다. 분명 여기였는데 왜 없는 걸까? 내가 놓친 걸까? 꽤 오랜 시간을 서성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 지난주에 찍어둔 사진을 다시 보며 자리를 찾았다. 없다. 여기가 맞는 데 없다. 우려가 현실이 되어버렸다. 감쪽같이 사라졌다. 다 녹아내린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솔잎 사이를 헤쳐봤지만 없었다. 아쉽고 서운한 마음에 쉬이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 앞에 철퍼덕 쭈그려 앉았다. 무릎에 턱을 괴고 멍한 시선으로 버섯돌이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봤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무채색의 풍경 너머로 초록 잎들이 아른거렸다. 일렁이는 초록빛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버섯돌이들이 내려앉은 자리에 무성한 풀이 자라나 초록이 가득했다. 녹아내린 버섯돌이들이 초록이들에게 든든한 영양분이 되어준 듯하다. 원래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또 다른 모습으로 숲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니 허전했던 마음이 조금은 채워지는 것 같다.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숲을 걷는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 저마다의 모습으로 비와 바람을 겪은 후 다시 여느 때처럼 삶을 이어나가는 숲을 보며 나의 일상도 다시금 살펴본다. 코로나 19 라는 태풍이 몰아치고 있는 지금, 여태껏 경험해본 적 없는 세차고 모진 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일상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하루하루가 고민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한참 후에 2020년은 어떻게 기억될까. 지난 과거처럼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뭔가 이렇게 한 해를 보내고 어영부영 한 살을 먹으면 왠지 억울할 것만 같다. 정말로 그렇게 되기 전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라고 숲이 말해준다. 지난 과거에 머물지 말고, 먼 미래를 끌어당기지 말고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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