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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 Oct 24. 2021

오늘은 나도 해 바라기

해님과 짝짜쿵, 초록이들과 짝짜쿵

 숲으로 햇볕이 쏟아지는 여름날, 잎과 잎 사이로, 가지와 가지 사이로 스미는 빛이 더없이 곧고 더없이 진하다. 밤보다 낮이 긴 계절, 충만한 해님의 에너지를 받으려 숲은 분주하다. 그래서 출근할 때와 퇴근할 때 만나는 숲의 얼굴이 다르다. 출근할 때는 내 정수리 쪽에서 빛이 비쳐 숲의 모든 얼굴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빛을 받으려고 줄기로 바로 세우고, 잎을 이리저리 흔든다. 종일 해님을 따라다니며 놀아달라고 칭얼거린다. 퇴근할 무렵엔 빛이 반대로 흘러 해님과 내가 마주 서는데, 해님과 나 사이엔 여전히 해님을 졸졸 쫓아다니는 숲의 뒤통수들로 가득 찬다. ‘해바라기만 해 바라기가 아니네!’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에 웃음이 난다. 여름엔 숲의 모두가 해바라기가 된다.


 빛을 머금은 숲은 초록의 기운이 가득하다. 하지만 초록도 다 같은 초록이 아니다. 숲에는 다양한 초록이 있다. 길에서 한 그루, 두 그루 만날 때는 크게 다가오지 않았던 차이를 숲에서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여러 나무가 한 데 모여 있으니 더 확연히 드러난다. 더군다나 지금은 나무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푸른 잎을 선보이는 시기여서 다채로운 초록을 즐기기에 딱 맞다. 짙고 단단한 초록의 소나무, 팔랑거리는 형광 연둣빛 중국단풍, 차분하고 담담한 녹색의 회화나무. 이렇게 나무가 뿜어내는 색 자체가 다르기도 하지만, 잎의 모양이 주는 감각이 더해져 더 풍부하게 초록이 느껴진다.


 이 초록 저 초록 비교하며 관찰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는데 투두둑 툭! 둔탁한 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주위를 살펴보니 가까운 곳에 초록 알맹이 하나가 보였다. 아직 여물지 못한 밤송이가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것이다. 홀로 나무에서 떨어진 어린 밤송이는 잔뜩 뿔이 난 것 같다. 아직 떨어질 때가 아닌데 바람에 져버린 게 심통이 난 듯 초록 가시가 예리하다. 뾰족뾰족 날을 세운 밤송이 곁에는 또래의 어린잎이 있었다. 바람에 파르르 떨리는 이파리는 토닥토닥, 뿔난 밤송이를 어린잎이 달래주는 걸까? 아니면, 으악! 앗 따가워! 갑자기 굴러들어 온 밤송이를 건들다가 가시에 놀란 걸까? 어떤 모습이든 보는 나는 그저 귀엽기만 하다. 친구를 달래주려 따가움을 감수하며 살펴주는 토닥거림이어도 좋고, 자기 구역에 끼어든 녀석에게 장난을 치려다가 도리어 자기가 당해버린 모습이어도 좋다. 초록 열매와 초록 이파리가 만든 또 하나의 초록 장면이니까. 



초록 지붕 아래 초록 러그가 깔린 길을 걷는다. 힘차게 걸으며 땀을 쭉 내본다. 선명하고 반짝이는 초록을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담고 싶으니까. 햇빛은 가능하면 어떻게든 피하는 편인데, 오늘은 초록이들을 따라 해 바라기가 돼본다. 뜨끈하게 데워진 나무 벤치에 앉아 햇살을 맞고 있으니 노곤노곤해진다. 한낮의 해가 기울어 빛이 뜨겁지 않고 따스하고 포근했다. 흐린 날에도 자외선만 쏙쏙 골라내어 흡수하는 피부라 발갛게 익을까 봐 조금 걱정스럽지만, 그래도 근무 시간도 끝났겠다, 언제 이렇게 햇볕 아래서 쉬어 가겠나 싶어 눌러앉았다. 점점 해가 짧아질 테고 겨울엔 방구석에 콕콕 숨을 테니 지금 빛을 마음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분명히 이 햇살이, 이 초록이 그리워질 순간이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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