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11.
연애 첫날부터 당신은 자신의 마음을 한껏 열어보였다. 그때 당신의 모습은 누가 봐도 ‘진짜 좋아 죽네, 죽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매번 세상에 관한 시니컬한 글 아니면 남을 웃기기 위한 각종 드립으로 난무하던 당신의 페이스북이 연애 이후 옅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무엇을 써도 꿀 바른 글이어서 내 친구들 사이에서 당신은 ‘환희버터칩’이라고 불렸다. 한 친구는 “너 혹시라도 나중에 헤어지면 환희 씨 나한테 넘겨”라며 부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반면에 당신 친구들은 180도 변한 당신 모습에 ‘뭐 잘못 먹었냐’고 놀렸다.
초반에는 부담스러웠다. 당신 입장에서는 거의 1년간 품어왔던 연정이 받아들여진 날이었지만, 나에게는 고작 1, 2주 전에 친구 이상의 호감이 생긴 이성과 차츰 알아가기로 결정한 정도였으니까. ‘엇, 이거 길 잘못 들었다’ 싶으면 금세 발을 빼고 이 관계를 정리할 수도 있을 정도의 감정. 그러니 고작 어제 만나기 시작했는데 오늘 온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관계를 다 알아버린 것 같은 상황이 나로서는 크게 당황스러웠다. 당신에게 제안했다.
“우리 회사는 정말 말이 많고 소문이 금세 돌거든. 그래서 당분간 내 페이스북에서는 우리가 연인인 티 안 내줬으면 좋겠어.”
당시 나는 합정 근처에서 남자 지인과 길만 걸어도 다음 날 “지은 씨, 그 친구랑 사겨?”라는 질문이 돌아오는 엄청난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동료들은 사생활 노출을 친분의 지표로 삼았다. 상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는 사적인 영역에 관심을 두지 않는 나로서는 순탄치 않은 생활이었다.
언젠가는 사귀던 애인과 헤어진 뒤에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회사 동료는 본인 자녀를 바라보는 나에게 “지은 씨, 우리 애 보면서 무슨 생각해요? 전 남자친구와 결혼했으면 이런 아이 있었을 텐데, 뭐 그런 생각하는 거예요?”라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건네었다. 그 후 ‘누구와 만나도 절대 회사에서 티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니 연애 첫날부터 ‘우리 사귄다!’라고 동네방네 소문내는 당신의 행동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관계 노출을 꺼리는 내게 당신이 많이 서운했을 것 같다. 티 나게 풀이 죽은 당신을 보며 미안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당신이 나를 위해 “영육 모두 좀더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쓴 연애 글에 시치미 떼고 이런 댓글을 달았다.
“연애 축하해요! 브레이트 시가 생각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당신은 내 댓글에 “고마워요. ^^ 지은 님도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라는 답글을 달았다. 이후 우리 댓글에 ‘좋아요’가 수십 개 달렸다. 이미 우리가 연인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코 꿰었다 셈치고 이 사람과 오래 만나야겠네’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미지근하게 시작한 내가 어떻게 만난 지 3개월 만에 당신에게 ‘우리 그냥 결혼하자’고 제안했을까. 돌아보면 신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