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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스타시아 Mar 16. 2020

지긋지긋한 가난의 냄새

착취 도시, 서울


쪽방촌 빈민층과 청년의 미니원룸을 취재한 기록을 담은 <착취도시, 서울>을 읽었다.


책에 등장하는 “지긋지긋한 가난의 냄새”는 내 머릿속에 ‘가게 쪽방’이라는 분명한 형태로 각인되어 있다.


엄마의 가게에는 두어 평짜리 쪽방이 붙어 있었다. 내가 돈도 벌고 영어도 배워 오겠다며 호기롭게 한국 밖을 나간 사이에, 부모는 생활비를 아낀 돈으로 빚을 갚겠다는 명목으로 그 쪽방에서 생활했다. 더블 침대 하나 놓으면 한 뼘 만한 바닥만 남는 공간에, 돼지코 온수히터로 뜨거운 물을 충당하는 생활. 나 없는 동안 그 공간에 있었던 내 부모와, 앞으로 그들과 함께 그 공간에서 생활해야 할 내 상황이 수치스러웠다.


사실 그 가난은 아빠의 사업빚과 동생과 나의 교육비가 공동으로 만들어낸 작품이었을 텐데, 전자의 규모가 월등했기에 나는 우리의 가난에 비례해 아빠가 미웠다. 쓰리잡을 뛰고 있던 엄마는 갱년기까지 겹치면서 그야말로 위태로웠고, 아빠를 향한 차마 내보일 수 없는 분노에 어찌할 줄 몰라 했던 내가 있었다. 아빠가 너무 미워서, 엄마에게 ‘이혼하고 싶으면 그래도 상관없지 않냐’고 거친 말을 건넸던 기억도 난다. 그때 내 말을 들은 엄마가 결국 이혼을 선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5평짜리 쪽방촌에서 20여 년 살았다는 박씨에게서 자꾸만 아빠가 오버랩되었다. 보일러도 안 되는 그 작은 방을 위해 한 달에 25만 원을 내야 하는 그는 살면서 단 하루도 일을 손에 놓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가난은 지독한 것이어서, 한번 달라붙으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박씨는 쪽방촌에서 몽글몽글한 신혼을 만끽한 적도 있지만 가난한 이들의 결혼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쪽방촌 사람들의 목표는 더는 절벽으로 밀리지 않는 것뿐이다. 버티는 것뿐이다. “이 삶이 5년 안에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누군가는 그들을 보며 ‘노오력하지 않아 받는 잘못’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로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노오력이란 모두가 같은 선상에 있을 때만 작동하는 그 무엇이다. 100미터 달리기 시합에서 시작점이 50미터 차이가 나는데, 그들에게 ‘노오력’을 말하며 손가락질하는 것은 구조를 보지 못하는 자신의 우매함을 드러내는 행동일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내 부모보다 삶에 열심인 이를 만난 적이 없지만 가난은 엄마의 고단함과 아빠의 성실함이 더해져도 수십 년간 따라다니는 시시포스의 형벌이었음을 몇십 년간 지켜보았다. 쪽방촌 속 그들의 삶은 자칫하면 내가 되었을지 모를 삶이었다.


그들의 삶이 한편으로 소름끼치면서도 그들의 고혈을 빨아 부의 상징인 타워펠리스에 입성한 건물주들을 차마 악마라고 욕하지도 못하겠다. 나는 내 안에 그들과 같은 욕망이 존재함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나에게 방을 작게 쪼개고, 마당 위에 슬래이트 지붕을놓아 방으로 만들면 이른바 ‘캐시카우’가 탄생한다는 정보와 재력이 있었다면 과연 그냥 지나쳤을까. 예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다. 악마는 타고나지 않는다. 생각이 죽으면 악마가 된다. 나는 이 책에서 나의 위선을 보았다.


세상 모든 사람이 건물주가 되겠다고, 건물주가 ‘갓물주’라고 외치는 세상이다. 그 안에서 ‘사는 게 형벌 같다’며 울먹이는 이들이 한 하늘 아래 함께하고 있다. 나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그 가난으로 다시 굴러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눈에 비치는, 아빠의 한숨을 무시하지도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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