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10.
길어봤자 3개월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우리 사랑의 깊이에 비해 남은 시간이 너무 짧다'였다. 우리가 그 기간 내내 밤을 새 사랑을 속삭인다고 해도 성에 차지 않을 시간. 그래서 시한부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간병인으로 들어간 시아빠에게 ‘내가 간병하겠다’고 이야기하고 바로 코로나 검사를 받은 뒤에 병원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에 환한 미소를 비추더니 내내 싱글벙글했다. 당신의 온 관심이 나에게 향해 있어서, 시아빠가 당신에게 “아빠 간다!”고 인사했는데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바람에 내심 서운해하셨다. 병원에서 빠져나와 친척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고향 상주로 내려갔을 때도, 다시 서울 집에서 호스피스병동에 들어가기 전까지 간병할 때도 당신은 ‘엄마’나 ‘아빠’를 찾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까 내게 당신이 전부였듯이, 당신에게도 언제나 내가 전부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뿐이었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 혼자 간병하기에는 힘에 부쳤고, 아무리 ‘그만하시라’고 밀쳐내도 자꾸만 내 자리를 탐내는 시엄마를 뿌리칠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나날이 가장 평온했던 것 같다. 더는 시엄마가 내게 그 무엇도 명령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물론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상황 때문이었겠지만.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일정 기간마다 간병인을 변경하기도 한다. 환자와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기도 했고, 간병하는 이의 건강도 생각해서 보통 가족이 한두 주에 한 번씩 교대한다고 한다. 종종 말라가는 나를 마주한 호스피스 간호사나 수녀님이 힘들어 보인다고, 가족 가운데 교대할 사람 없냐고 물어볼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에게도 내 자리를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겨우 단 둘이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누구에게 내 자리를 넘기나. 당신을 누구에게도 넘겨줄 생각이 내겐 없었다.
시아빠에게 임종도 혼자 보겠다고 선언했다. 그 모든 것이 내가 바라던 바였음을 짐작도 하지 못하던 우리 엄마는 임종 순간에 나 혼자 남을까 싶어 전전긍긍하며 시부모에게 ‘빨리 서울로 올라와 계시라’고 닦달했지만 말이다. 결국 당신의 마지막을 함께한 사람은 가족 가운데 나뿐이었고, 나는 그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은 3개월 동안 당신과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 시엄마에게서 당신을 지키느라, 시엄마를 미워하느라 그 귀한 시간의 많은 부분을 소진했다. 시엄마에게는 내가 안중에도 없었고, 나는 그런 그에게서 내 자리를 빼앗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자신은 20여 년 동안 아들과 함께했겠지만 나는 고작 6년밖에 함께하지 못했는데, 어째서 이 시간을 빼앗아가지 못해 이 난리인가. 그가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있는 힘껏 미워했다.
한번은 내가 요양병원과 통화하는데 마음 급한 시엄마가 내 전화기를 낚아채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정말 꼭지가 돌아버려서 그 자리에서 악을 쓰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하던 시엄마와 안방에 있다가 달려나와 “왜, 왜 그래” 묻던 울음 섞인 당신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지금도 여전히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얼마 전, 엄마와 시부모 이야기를 하다가 또다시 그때 감정으로 돌아갔다. 한껏 흥분한 내게 엄마는 “그분이 엄마잖니”라고 말했다. 남편 잃은 슬픔은 시간이 갈수록 감정이 무뎌지지만 자식 잃은 슬픔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겠지만, 오히려 나는 그런 말이 내게는 ‘너의 슬픔은 별것 아니니 가만히 있어라’로 들린다. 곧장 대꾸했다. “나는 뭐 안 슬퍼서 이러고 있는 줄 아나? 아내의 슬픔은 슬픔도 아닌가?” 그 말에 엄마는 “슬픔을 경쟁하지 말라는 뜻이야”라고 대답했다.
시간이 지나고서도 잊히지 않는 문장이 몇 가지 있는데, ‘슬픔을 경쟁하지 말라’는 엄마의 말도 그중에 하나다. 그러니까 나는 시엄마와 ‘누가누가 더 슬픈가’, ‘누가누가 더 당신을 사랑하나’를 두고 경쟁하고 있었다. 그 같잖은 경쟁에서 시엄마를 이겨보겠다고, ‘내가 더 슬퍼’라는 문장을 증명하기 위해 그토록 악다구니를 쓰고 바닥에 드러눕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당신이 떠난 지 100일째 되는 날, 시엄마는 그 마른 손으로 당신 무덤 앞 현판을 가만가만 쓰다듬더니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살렸어야 하는데… 미안하구나”라고 읊조렸다. 그리고 그 중얼거림을 바라보며 나는 이 슬픔 경쟁에서 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