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 편집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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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삼풍의 생존자입니다> 칼럼은 나름 유명했다. 매년 4월이면 SNS에 그 글이 떠돌아다녔고, 나 역시 한 번쯤 퍼 나른 적 있다. 읽을 때마다 ‘이분은 어쩜 글을 이렇게 쓰지’ 감탄했다. 글에 대한 감이 좋았다. 정식으로 작법을 배운 적이 없는 것은데, 적확한 단어를 적절한 곳에 잘 활용하는 감각이 있었다. 게다가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본 자만이 할 수 있는 생각과 말이라서 읽을수록 배울 점도 많았다. 가장 마음을 울렸던 문장은 “슬프지 않았던 날들이 모두 행복이었다”였다. 이 글을 책으로 읽고 싶어졌다.
처음 작가님께 제안을 보냈던 장면을 기억한다. 나름 정성스럽게 메일을 보냈고, 대차게 거절당했다. 이런 일로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 이미 몇 군데 출간제안을 받았으나 전부 거절했다고. 이해했다. 그의 글을 책으로 내고 싶은 건 업자로서의 내 욕심이다. 그분에게는 ‘불행을 전시해서 남들에게 보여달라’는 제안이 얼마나 잔인하겠나. 거절이 당연한 반응이었다. 거절당한 아쉬움보다 동료 시민으로서의 미안함이 더 컸기에 그 의견을 존중하고 싶었다.
편집자로서는 포기했으나 독자로서의 아쉬움이 남았다. 그의 말에 대답을 보냈다. 당신의 목소리에는 의미가 있다고. 최대한 당사자의 목소리가 세상에 많이 나와야 비당사자와 당사자 사이의 간극을 줄일 수 있다고. 더불어 나와 함께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좋은 편집자를 만나 책으로 내셨으면 좋겠다고 썼다. 사실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하고 보낸 편지였고, 지금 생각하면 주제 넘는 참견이었는데, 그 메시지가 작가님에게는 하트 시그널처럼 느껴졌나 보다. 갑자기 태세를 전환한 이메일이 도착했다. “이지은 님과 책, 하고 싶어요.”
여기까지는 ‘프로페셔널한 편집자’ 느낌이지만 이후로는 그분에게 별로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첫 미팅 때 작가님을 앞에 두고 아빠 이야기를 하다가 펑펑 울었다. 일하는 자리에서 왜 죽은 아빠 이야기를 했을까.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머, 제가 왜 이러죠” 중얼거리며 훌쩍이는 나를 가만히 보던 작가님은 “괜찮아요. 제 앞에서는 다들 울어요”라며 살며시 웃었다.
책을 만들다가 남편과 고양이가 동시에 아팠고, 동시에 떠났다. 그 때문에 휘청거리는 모습을 작가님에게 실시간으로 보여주었다. 이 모든 상황이 창피했는데, 작가님은 그저 옆에 있어주기만 했다. 어느 날 한손 가득 츄르를 들고 오셨던 기억이 난다. 두 팔로 다 안아도 넘칠 양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회사에 돌아왔다고 메일을 보냈다. 작가님은 “저자도 편집자도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죠”라고 보냈다. 그 글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지.
복귀 후 첫 미팅을 작가님 집에서 진행했다. 작가님은 책 이야기는 하지도 않고 내게 밥만 먹였다. 예쁜 접시에 쌓아올린 밀전병이 기억난다. 곱게 차린 식탁에 나를 앉힌 작가님은 ‘밥 잘 챙겨 먹으라’고 다독였고, 나는 작가님 앞에서 또 울었다. 아주 울려고 만난 사이 같았다.
그 후 몇 번이나 그분 앞에서 눈물 흘렸는지 모르겠다. 책 만들며 글에 감정이입해 운 횟수까지 더하면 수십 번은 될 것 같다. 이상하게도 작가님 앞에서는 쉽게 무너졌다. 내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고 느꼈나, 아니면 그의 위로가 글처럼 적확해서였나.
사실 대부분은 그가 아닌 나를 위한 눈물이었고, 그게 참 민망하다. 편집자가 이래도 되나. 저자를 보듬어야 하는 위치가 이렇게 보필받아도 되나. 편집자 자아와 이지은 자아 사이에서 자꾸만 휘청거렸지만, 이제는 부끄럽지 않았다. 힘들 때는 기꺼이 남에게 기대야 한다는 걸 작가님 원고를 보며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원고 추가 글은 <밥 먹고 다니라는 말>이었다. “우는 건 좋은데, 기운 빠지니까 밥 먹고 실컷 울었으면 좋겠다”는 그 글의 마지막 문장은 작가님이 나를 향해 쓴 말이 아닌가 싶었다. 덕분에 힘든 시기에 실컷 울고 밥 많이 먹으며 책을 만들었다. 말 그대로 눈물로 만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