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혼자 할 수 없다. 서로를 향한 무한한 응원, 등번호와 이름이 적힌 유니폼, 함께 선 이들과의 동지애 등은 소속 없이는 얻지 못한다.
한번 입단하면 평생 안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 풋볼 클럽 선택에 심혈을 기울였다. 서로에게 무해하고 안전한 관계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관대한, 이른바 페어플레이 정신이 깃든 이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라면 부족한 나를 따뜻하게 보듬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한 달간 고민한 끝에 나를 가장 살뜰하게 챙겨준 한 아마추어 축구단에 가입했다.
팀원들은 대부분 축구 경력 2년차로, 이제 초보 딱지를 떼고 한창 물 오른 기량을 발휘 중이었다. 입단 당시에 나는 축구공 두어 번 만져본 게 다였기에 그들이 '하늘같은 대선배님!'처럼 느껴졌다. 하필 또 나이는 내가 제일 많은지. 실력도 체력도 미미한 왕언니는 한동안 팀을 겉돌았다. 웬만하면 어디 가서 주눅 들지 않는 성향인데도 필드 위에만 서면 자꾸만 어깨가 안으로 굽었다. 잘하는 이들 사이에 있으면 더 빨리 늘 줄 알았는데, 느는 건 눈치뿐이었다.
친구들은 수시로 친선경기를 주선하거나 아마추어 축구 대회에 참가했고, 자꾸만 내게 경기 참여를 독려했다. 그들에게 "알았어, 알았어"라고 대답했지만 경기 참석 투표에 슬그머니 '불참' 버튼을 누르는 날을 반복했다. 출전을 망설인 이유는 하나였다. 나 때문에 질까봐, 친구들 열정에 찬물 끼얹을까봐. 한번은 우리 팀이 친선 경기에서 승리했는데, 혼자 조용히 '이번 승리는 다 내 덕이야, 내가 안 간 덕분이지'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입단 4개월째. 내 소극적인 태도를 주장이 내내 주시하고 있었나 보다. 별명이 '황소'인 그는 언제나 저돌적인데, 한번은 내게 "언니는 대체 언제까지 도망 다닐 거야!"라며 불같이 몰아쳤다.
"인큐베이터 속 아기처럼 곱게 키워준다며…."
"그런 게 어디 있어! 우리는 다 축구하자마자 경기 나가고 그랬어!"
코너 끝까지 몰아붙이는 황소의 기세에 잔뜩 찌그러진 나는 결국 "알았어, 나갈게. 나가면 되잖아"라는 대답과 함께 울면서 그다음 경기 출전을 감행했다.
개인적으로 경쟁에 굉장히 취약한데, 지난한 사회생활을 거쳐 드디어 지지 않는 법을 터득해왔다. 바로 '그 무엇도 시도하지 않기'다. 시작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으니까. 보통 순서를 기다릴 때도 상대가 나보다 의욕적이면 물러나 줄 마지막에 서고, 서로 양보하는 분위기일 경우에는 제일 앞으로 나아간다. 곱게 자리를 넘겨주고 남들이 꺼리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이런 내가 시합이라니, 이겨야 한다니, 물러서지 말라니.
전전긍긍하며 돌아다니는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누군가가 "첫 게임인데 누가 뭘 바라겠냐. '못하지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겠다'는 마음이면 됐지"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러게. 누구도 내게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데! 이를 깨달은 순간 온몸에 들어갔던 힘이 스르륵 빠졌고, 이내 경기에 출전할 용기를 얻었다.
첫 출전 날. 지인의 조언 덕인지 경기장 위에 섰음에도 심장박동이 빨라지지도, 긴장하지도 않았다. 축구 5개월차 햇병아리라 경기 전체를 볼 여유는 없어서, 그냥 눈앞에 있는 것 하나만 제대로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공 한 번만 걷어내고, 몸싸움 한 번만 이겨내고, 상대 공격수 따돌리지는 못해도 적어도 불편해하게끔 알짱거리고.
한번은 킥인(터치라인 밖으로 나간 공을 발로 차서 들여보내는 풋살 규칙) 상황이 왔다. 가장 가까이 있던 탓에 터치라인으로 다가서는 동안 상대팀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꼈다. 그들이 자리 잡기 전에 빨리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공을 라인에 놓자마자 바로 상대팀 안쪽에 포진하고 있던 S에게 찔러줬다.
S는 순간적으로 수비수 하나를 제치더니 긴 포물선과 함께 오른쪽 공격수인 H의 발에 찰떡같이 붙여주었고, H의 반 박자 빠른 슈팅이 상대의 골망을 흔들었다. 다들 S의 어시스트와 H의 골 결정력에 환호성을 지르는데, 나는 속으로 나만 칭찬했다.
'와, 방금 뭐야? 나 너무 멋있잖아….'
곧 나의 첫 축구 경기의 끝을 알리는 휘슬 소리가 울렸다. 경기 후 팀 친구들에게서 "언니 첫 출전 축하해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제야 내가 이 팀의 일원이 되었구나'라고 느꼈다. 실수해서 폐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도망 다닐 때는 모르던 감정이었다.
그간 남보다 늦게 시작했다고, 어설프고 느리다는 이유로 너무 몸을 사리지 않았나. 어쩌면 나를 가장 못 미더워했던 건 내가 아니었을까. 신입의 한자어는 새로울 신(新) 자에 들 입(入) 자로, '새로 들어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경험치가 0인, 모든 게 낯선 새 사람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품겠는가.
회사에서 월급 주는 사장조차 신입의 가능성을 보고 돈을 지불하는 것일 뿐 단기간에 큰 업적을 이루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저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 그만이다. 누구에게나 실수를 쌓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그 기본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어설픔을 인정하고, 스스로에게 기꺼이 실수할 시간을 주려고 한다. 아무런 시도도 없이 냅다 도망가기보다는 기꺼이 망가져보겠다. 그러다 보면 뭐라도 하나 건지지 않을까. 이번 경기는 7대 3이라는 대패로 마무리되었지만 적어도 '첫 출전'이라는 작은 성취를 얻은 것처럼 말이다. 경쟁의 패배로 얻은 대가치고는 꽤 마음에 든다.
*해당 글은 오마이뉴스의 선연재되고 있습니다.
브런치에는 15일 늦게 공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