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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스타시아 Aug 16. 2022

초면에 죄송한데요, 저 축구 좀 가르쳐주세요!

축구 초보자를 위한 몇 가지 지침

축구인으로 성장하려면 어떤 덕목이 필요할까? 수십 분을 뛰어도 고갈되지 않는 체력? 순간적으로 상대를 제치는 탁월한 개인기 능력? 넓은 시야? 빠른 순간 스피드? 대단한 드리블 실력? 골 결정력?


물론 모두 중요한 능력이지만 초보자에게는 지난하다. 이런 능력들보다 빠르고 쉽게 갖출 수 있는 태도는 '끈질김'과 '들이대기'가 아닐까 싶다. 마음만 먹으면 되니까.


▲  풋볼클럽 친구들과 함께 찍은 단체 발 사진. 풋살화는 화려할수록 좋다.



30대는 재력으로 운동한다?


시작은 늦었어도 성장만큼은 빨랐으면 싶은 마음에 자꾸만 조급해졌다. 언젠가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에서 농구선수 현주엽이 농구에 노련해지고 싶다는 송은이에게 "농구 잘하고 싶으면 방송 녹음하는 지금도 한 손으로는 공을 튀기고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 적이 있다.


그 말을 귀에 담으며 '회사 책상 밑에서 굴릴 풋살공 하나 살까? 책상에 가려지니까 내 발놀림 아무도 모르겠지?' 생각했는데, 내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서 참았다. 대신에 점심시간마다 회사 근처 공터에 몰래 숨어들어 리프팅(발, 이마 어깨 등을 활용해 공을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고 튀기는 훈련) 연습을 했다.


그마저도 연습 첫날부터 한 동료에게 발각당했고, 그가 다른 동료들을 불러 모아 구경시키는 바람에 수치심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하루 해프닝으로 끝나버렸지만.


같이 축구하는 친구들은 나보다 이미 몇 단계 레벨업한 상태라 마음이 급했다. 비슷하게 시작했어도 지척에 함께 공을 차주는 애인 덕에 훨씬 성장 속도가 빠른 이들도 몇 있었다.


반면에 나는 축구와 풋살의 차이도 잘 몰랐고(내가 축구하는 줄 알았는데 풋살이더라!), 구기종목도 거의 처음 접해보는 데다가 내 미숙함을 기꺼이 인내해줄 만한 애인도 없으니까. 열심히 하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답답했다. 그때 축구 친구 황소가 조언을 주었다.


"언니, 20대가 체력으로 운동한다면 30대는 재력으로 운동하는 거야. 20대는 체력, 30대는 재력. 돈을 써."


30대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축구교실을 수소문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축구교실은 초등부 어린이가 중심이고, 그나마 여성 초보 수업은 평일 오전 10시에 개설된다는 점이었다. 팀 설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초보 여성/주부반."


여성은 성별이고 주부는 직업인데 어떻게 한데 묶이는지 의아했는데, 이는 합집합이 아니라 교집합이어야 수강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이 시간대는 가족을 회사/학원/학교에 보내고 잠깐 숨 돌릴 틈에 운동하려는 여성들이 참여 가능한 시간이고, 여성이지만 직장인인 나는 해당 사항에 들지 못했다.


저녁 시간대에는 보통 직장인반/선수반으로 구성되는데, 이 역시 기본값은 '남성'이었다. 나는 마치 좋아하는 이에게 고백했다가 가차 없이 거절당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남자들만 축구 가르쳐주고… 나는 안 가르쳐주고…."


왠지 모를 서운함에 실망하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집에서 한 시간 떨어진 축구교실 여성반을 찾아냈다. 수업은 저녁 8시 30분부터 10시까지. 왜 이렇게 늦게 시작하는지 물었더니, 주부들이 아이들과 남편 밥 차려준 다음에 나오는 시간대라고 한다.


평일 여덟 시간 근무하고 격렬한 운동까지 마친 후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 기진맥진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다른 선택지가 없다. 돈을 써서 배우겠다는데 받아주는 데가 이렇게 없다니. 대체 어디 가서 내 재력을 과시하나.



▲  주말 아침 집 근처 풋살장에서 급 번개쳤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너무 더웠던 나는 한 시간 뒤에 풋살화를 내동댕이쳤다.


일주일에 축구 여덟 번 하는 사람


그래서 얼굴에 철판 깔고 아무에게나 '축구 선생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기로 했다. 파주, 고양, 김포, 화곡, 은평 등 서울 서북부 지역 어디서든 나와 축구해준다는 이가 있다면 따라나섰다. 언젠가 한 후배에게 "축구 좋아한다는 네 애인 일주일에 두 시간만 빌려달라"고 졸랐다. 실제로 그의 애인이 내 제안을 수락해서 토요일 오전마다 축구를 배우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한번은 동네 친구가 축구 좋아한다는 지인을 연결해주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분 집으로 찾아가 "안녕하세요? 축구 좀 가르쳐주세요!"라며 들이댔다. 처음에 한껏 당황한 그는 "제가 누굴 가르쳐줄 실력이 안 돼요"라며 손사래를 쳤는데, 나중에는 "알겠습니다. 제 이름이 뭡니까. 축구선수 이천수와 똑같이 천수예요. 저만 믿으세요"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나는 천수님을 '코치님'이라 부르며 따르기로 했다.


당시에 천수님은 우리가 한두 번 만나고 말 사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축구 가르침을 허락하기 전까지 물러날 기미가 없는 나를 살살 달래어 떼어낼 생각 아니었을까. 어쩌면 필드에서 한두 번 상대해주고 보낼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고. 반면에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내 근성은 우리 관계를 일주일에 한 번씩 동네 풋살장에서 함께 축구하는 사이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천수님은 내가 아무리 번개를 쳐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축구해주지 않는다. 여기서 '들이대기' 기술의 한계가 드러난다. 천수님 같은 축구친구가 다섯 명만 더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요일마다 돌아가면서 들이댈 텐데.


무리한 축구 일정으로 골반과 허벅지에 탈이 나 몇 주간 도수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올 때마다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하는 환자를 담당하게 된 내 치료사는 울상이 된 얼굴로 "대체 일주일에 몇 번이나 축구하시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갑자기 밀려드는 민망함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다가 "여덟 번…"이라고 대답하며 끝을 얼버무렸다.


토요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A팀에서 축구하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에 돌아와 한바탕 샤워한 후 낮잠을 몰아 자다가 일어나 저녁을 입안에 욱여넣고 다시 B팀에서 축구하고, 12시간 뒤인 일요일 아침에 다시 축구를 가는 나날을 반복하던 때였다. 내 말에 그는 "네? 선수들도 하루 시합 나가면 적어도 24시간은 쉬는데요? 게다가 회사 다니시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치료사 선생님 축구 잘해요? 저 좀 가르쳐주세요."


지금은 삶의 밸런스를 위해 축구를 일주일에 네다섯 번으로 줄이고 다섯 군데까지 늘렸던 풋볼클럽도 몇 군데 정리했다. 초보 축구인이 '끈질김'과 '들이대기' 다음으로 갖추어야 하는 덕목은 '오버하지 않기'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물론 동네에 축구친구 다섯 명만 더 사귀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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