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3.
내 하루는 당신 중심으로 돌아간다. 여느 때처럼 “이환희 씨, 나 일어났어” 중얼거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에는 당신이 좋아하던 음악을 들으며 당신의 글을 하나둘 정리하고, 오후에는 보험사나 사망신고 관련 서류 작업 업무를 진행한다. 저녁을 먹으며 당신 외장하드에 저장된 영화 가운데 한 편을 감상한다. 영화가 끝나면 9시쯤. 아직도 잘 시간은 멀었다. 그때 비로소 한글 파일을 열어 당신을 떠올리는 일기를 쓴다. 쓰면서 한번 왈칵 울고 난 다음에 씻으면 한결 개운하거든. 샤워 후 잠옷으로 갈아입고 온수매트 위에 누워 당신 휴대전화로 SNS에 접속하거나 우리가 나누었던 텔레그램 대화를 복기해본다. 읽으며 몇 번 울다 웃으면 금세 잘 시간이다. “잘 자, 이환희 씨.” 중얼거리며 불을 끈다.
이처럼 당신이 남긴 숙제를 해결하고 자잘한 흔적을 찾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요즘이다. 당신 외장하드에 저장한 영화를 보며 당신이 왜 그 영화를 좋아했고 반복해 감상했는지 추측하는 재미가 있다. 오늘은 당신이 “연애를 잘하려면 봐야 한다”고 추천한 영화 <클로저>를 보았다. 모르겠던데. 오히려 당신이 전 연애에 실패한 이유가 <클로저> 같은 영화 보면서 댄(주드 로)에 감정이입했기 때문인 것 같던데. 첫눈에 반하는 설렘을 사랑이라 믿을 만큼 순진하고, 사랑한다면 온전히 진실해야 한다고 믿었던 댄에게서 어쩌다가 당신을 발견한 거니. 윤종신의 이별 노래를 좋아하던 감성과 비슷한 것일까. 나중에 만나면 캐물을 테니 입장을 정리해놓도록.
우리가 연애 시절 나눈 대화도 당신이 내 곁에 있었던 증거인지라 매일 밤 자꾸 더듬어본다. 당시에 자기는 입에 사탕 문 것처럼 달콤했는데, 그 글들 덕분에 나도 모르게 그때로 돌아가 슬며시 미소 짓곤 해. 당신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도 하루 일과 가운데 하나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당신을 탐닉하다 보면 허전했던 마음이 조금 달래지기도 한다. 내가 이토록 당신에게 의존적인 사람이었나 싶지만, 어쩌겠나. 이제 당신이 아니면 지난한 하루를 채울 재간이 없다. 당신이 습관이 된 나날은 내 찌질한 기쁨이다.
당신의 흔적을 찾는 과정은 동시에 나 스스로를 갉아먹는 독이기도 하다. 바뀔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며 곱씹는 미성숙한 사람 같고, 때로는 강박적으로 상대를 탐닉하는 스토커가 된 기분이다. 게다가 당신이 나에게 절대 보이고 싶지 않았을 문장들, 예컨대 옛 연인과 사랑을 나눈 순간과 이별의 고통을 발견할 때면 우리 함께일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몇 가지 감정들이 솟아오른다. 그때마다 ‘나 되게 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당신의 옛 연애나 훔쳐보며 질투하는 나약한 인간이었네’ 하며 자책하고, ‘자기야, 이 여자가 이기적이네. 당신은 사과할 필요 없었는데?’ 하며 당신 편을 들기도 한다. 또 ‘와, 이환희 씨. 이 정도 연애면 때려치웠어야지’라며 당신을 혼내기도 한다. 웃기지. 15년도 더 지난 사랑을 영화 보듯 들여다보며 코멘트를 달고 있으니.
당신은 죽기 전, 옛 애인에게 이메일도 보냈다. “잘 지내니”라는 그 메일 제목을 보고 호기심에 읽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메일은 상대의 근황을 묻고, 시한부인 자신의 근황을 전한 다음, 미숙했던 시간을 사과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시엄마는 “남자들은 죽기 전에 첫사랑을 생각한다더니” 하며 시아빠를 노려봤지만, 그건 시엄마가 당신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당신에게 1순위는 언제나 나였다. 심지어 나를 눈앞에 두고서도 나를 찾던 당신이다. 그런 당신이 첫사랑이 그리워서 연락했을까. 아닐 것이다. 아마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하니, 성숙하지 못한 시기에 성숙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 상처를 주고받았던 시간들을 메일로나마 속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저 사과할 대상이 첫사랑이었을 따름이다. <클로저> 속 댄이 죽기 직전에 앨리스(나탈리 포트만)나 안나(줄리아 로버츠)에게 그 시절 자신의 미숙함으로 관계를 망쳐서 미안했다고 사과 편지 쓰는 모습을 상상하면 적당하다. 아, 그래서 댄에게 감정 이입했구나.
당신의 연애를 훔쳐보며, 당신이 나에게 의미를 두었으나 나는 당신을 좋은 친구로만 생각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한 치 앞도 모르고 당신 앞에서 내 지난 연애를 줄줄 읊었다. 심지어 당신에게 내 찌질한 연애의 사계절을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내게는 짧았지만 당신에게는 길었을 그 시간 동안 당신은 얼마나 아팠을까. 지금 내가 가진 복잡다단한 이 감정들을 당신은 그때 이미 느꼈을 것이다. 이 감정들을 당신 또한 겪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나도 내 곁에 없는 당신에게 “잘 지내니”라는 제목의 메일을 보내 내 근황을 전하고 당신의 근황을 묻는 시간을 상상해본다. ‘잘 지내니’, ‘거기는 춥지 않니’, ‘거기서도 내가 보이니’, ‘나는 매일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어’ 같은 말들을 두서없이 적어 보낸 뒤에 오지 않을 답장을 한없이 기다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