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크리스마스

2020.12.24.

by 아나스타시아


“그런 일을 겪고서도 되게 밝으시네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니, 그렇지 않다. 나는 매일 나를 죽이고 또 죽인다. 아무도 내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이 상황이 싫어서, 스스로에게 기어이 상처를 주고야 만다. 즐거워 보이는 타인을 질투하고,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손 내밀기는커녕 ‘내가 더 힘들어’ 생각해버린다. 나약하기만 하면 다행인데, 성질마저 한없이 꼬여버렸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가 측은해져 다시 나를 살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밥을 먹고, 남들과 웃으며 떠들고, 당신을 기억하는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죽였던 나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서다. 아마 ‘그런 일을 겪고도 밝아 보인다’는 말을 들을 때는 내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매일 죽었다가 되살아난다. 죽고 죽이는 행위가 비순차적으로 일어날 뿐이다. 밝음과 그늘, 삶과 죽음에 큰 차이가 없음을 이제는 안다.


감정은 시시각각 널을 뛴다. 아무렇지 않게 남들과 만나 웃으며 밥 먹거나 통화하다가도 문득 귀에 꽂힌 노랫말 가사 하나에 마음이 무너진다. 나는 이제 우리가 자주 부르던 윤종신의 <환생>을 들으며 흐뭇해할 수 없다. 사랑의 시작과 설렘을 이야기하는 그 노래가 세상에서 가장 슬프다. 오늘은 빨래를 개다가 당신 잠옷을 발견했다. 내가 입었다가 세탁기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당신 옷과 내 옷으로 구분해서 옷장에 넣으려다가 멈칫하고, 윗도리와 아랫도리로 재분류했다. 이제 다 내가 입을 옷이니까. 이처럼 내 눈으로 당신 죽음을 확인하고, 내 입으로 당신 죽음을 언급해야 하는 순간은 매번 반복된다. 당신과 마지막 이별을 한 그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전에는 모 잡지사에서 내게 당신 추모 글을 부탁했다. 처음에는 ‘그래, 추모 글이라면 그 누구보다 내가 적임자겠지’ 생각했다가, 금세 ‘어떻게 나한테 이런 글을 시키지. 어쩜 세상은 이렇게 잔인하지’ 하며 혼자 화내고 억울해했다. 결국 잡지사 편집장께 전화를 걸어 거절했는데, 너무 미안해하는 그분 목소리가 다정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아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당신 추모 특집을 준비하는 고마운 사람에게 오히려 내 억울함을 토로하다니 나는 어쩌다 이토록 비겁해졌을까. 왜 나는 당신의 추모 글조차 쓰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일까.


추모 글이 난감했던 까닭은, 나도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어제는 환희 씨를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하는 다정한 아내가 되었다가, 오늘은 당신이 눈앞에 있다면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어댈 수 있을 만큼 난폭한 감정으로 변한다. 어제 쓴 글은 당신의 옛 사랑마저 보듬는 자비 많은 나로 스스로를 포장했지만, 오늘의 나는 그 글을 읽으며 ‘위선자네’ 생각한다. 이런 내가 어떻게 한 달 동안 읽히는 잡지에 당신의 이야기를 실을 수 있겠어. 그 글은 송고하자마자 거짓이 될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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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나는 지금 흘리는 눈물들이 당신이 아닌 나를 위한 것임도 안다. 나는 당신이 아닌 내가 불쌍해서 우는 거다. ‘당신 없이 혼자 남은 나’에게 연민을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계속 우는 까닭은 크리스마스이브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열심히 기념한 적도 없으면서, 당신 없이 보내는 첫 기념일인지라 감상에 빠진 것이다.


성당에 가고 싶지 않다. 하느님께 화가 아직 안 풀렸다. 그분도 지금 나에게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라는 게 얼마나 잔인한지 알 것이다. 나는 지금 누구도 축하할 수 없다는 것을. 내게는 빌어먹을 2020년, 망할 크리스마스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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