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누구나 인생이 바뀌는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 내게 그 계기는 ‘고양이’였다. 2010년 겨울, 엔진 열기로 몸을 녹이기 위해 트럭으로 잠입하던 3개월 된 노란둥이는 차 바닥에 목이 껴서 대롱대롱 매달린 채 살려달라고 울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던 건지, 녀석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왼쪽에 반신마비가 오고 턱이 부어올랐으며 머리 쪽은 차가워진 상태였다.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살지 못했을 목숨이라는 생각에 ‘이 녀석의 남은 생만큼은 내가 책임져야겠다’고 결심했다. 내 인생도 제대로 건사 못하는 마당에 어떻게 남의 생을 책임지겠다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 없으면 쟤는 죽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고양이는 내 결심을 자양분 삼아 잘도 커갔다. ‘보고만 있어도 배부르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작고 귀여운 생명체가 어떻게 도망도 안 가고 나만 보고 사나 싶어서, 넋 놓고 한참 들여다보던 게 몇 번이었는지 모른다. 손도 작고 발도 작아서 만지면 부서질까, 안으면 깨질까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한번은 자고 있는 녀석의 뒷다리를 가만가만 만져보았다. 허벅지부터 뒷다리까지 내려오는 그 라인이 꼭 프라이드치킨을 시키면 제일 위에 올려주는 닭다리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치킨도 동물이었지. 그때 처음 자각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사랑을 주고 아끼느라 안절부절 못하는 이 고양이와 식탁 위에 놓인 저 프라이드치킨은 모두 똑같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고양이를 통해 ‘치킨도 생명’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기억해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내가 먹는 고기와 내가 키우는 동물의 차이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왜 나는 고양이를 먹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하면서 프라이드치킨은 ‘치느님’이라며 찬양할까. 어째서 개와 고양이는 ‘반려동물’이고 소와 닭, 돼지는 ‘식용동물’일까. 모두 발로 걷고, 지능이 있으며, 뒷다리마저 똑같이 프라이드치킨 모양인데. 게다가 어떤 이들은 닭이나 돼지를 반려동물처럼 키우기도 한다던데.
누군가에게는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고양이와 닭의 차이점을 찾을 수 없어서 채식을 결심했다. 반려동물과 식용동물의 차이점을 발견했다면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역시 인생이 바뀐 몇 가지 순간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할머니가 만든 유대인 전통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던 어린 시절, 처음 아빠가 된 순간 느꼈던 벅찬 감정, 애정을 주고받는 것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는 강아지 조이를 입양한 사건 등. 자신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던 사소하지만 중요한 순간들을 언급한다. 그리고 생사가 오가는 전쟁 중에도 유대교 율법에 따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던 할머니에게서 배운 ‘중요한 게 없다면 지켜야 할 것도 없는 법’이라는 가르침을 실천하고, 내 아들이 먹을 음식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기 위해, 강아지 조이를 먹고 싶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채식을 하고,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한 책을 쓰기 시작한다.
포어는 동물권 활동가, 공장식축산업자, 방목형축산업자 등을 인터뷰하고, 직접 공장식축산업 현장에 잠입해 직면했던 장면들을 묘사한다. 그가 묘사하는 공장식축산은 싼 값과 효율성을 위해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확인하는 시험대 같다. 내가 반려묘에게 좀더 나은 공간을 제공하고 싶어서 원룸에서 투룸으로 이사할 때, 공장식축산업장에서 태어난 닭은 자신의 분뇨를 피할 곳도 없는 A4용지보다 작은 닭장 안에서 미쳐가고 있었다. 내 고양이는 하루 열일곱 시간씩 자는데, 공장식축산으로 길러지는 닭은 지금 이 순간에도 네 시간마다 깨어나 알을 낳고 있다. 그 네 시간마저 ‘죽지 않고 최대한 알을 많이 낳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 내 혀의 즐거움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동물이 희생되고 있는가 싶어 아찔해졌다. 또한 공장식축산업장은 미국 내에서만 초당 40톤의 배설물을 쏟아내 주변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캄필로박터균이나 살모넬라균에 감염된 닭고기들을 시중에 유통시켜 인간의 건강을 해치며, 좁은 공간과 밀집으로 동물들이 서로를 공격하다가 죽이도록 방치하고 있었다. 지금도 고기가 주는 혀끝의 익숙함으로 인해 너무 많은 생명이 죽어간다. 고기를 먹기 위해 우리의 건강뿐 아니라 지구 위 다른 생명체들의 목숨까지 담보 삼는다. 이러니 더는 ‘치느님’을 찾지 못할 수밖에. 인간의 욕심과 무지에서 비롯된 잔인함에 고개가 저어진다.
끝까지 읽으면 자연스럽게 ‘채식’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만, 이 책은 독자에게 ‘채식을 하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저 동물을 먹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인간으로서 자신만의 신념을 세우고 행동하라고 권할 뿐이다.
채식을 시작했다는 내게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야, 골고루 먹어야지. 인간은 잡식동물이야.” 맞다. 인간은 잡식동물이다. 탄수화물과 지방뿐 아니라 단백질도 주기적으로 먹어주어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인간이 어디 잡식동물이기만 한가.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며 이타적인 동물이기도 하다. 내 즐거움을 위해 희생당하는 존재가 있다면 기꺼이 멈출 줄도 안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는 그런 믿음 아래 쓰였다. 사람은 종종 이기적이지만 동시에 이타적이기도 하다는 믿음. 때로는 “불필요한 고통을 고의적으로 유발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해 무관심한” 잔인성을 보이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음을 알면 기꺼이 이타적으로 돌아설 줄 아는 존재라는 믿음. 작은 계기 하나만 생긴다면 프라이드치킨을 마구 뜯어 먹던 육식파도 ‘이 고기가 어디서 왔는지’ 한 번쯤 생각해보는 사람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음식을 하나 선택할 때도 자신의 신념을 담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인간밖에 없으니까.